지난달 27일 유남호·서정환 전 KIA 감독, 김재박 전 LG 감독 등 몇몇 야구인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단연 화제는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 자연스럽게 대화는 한국 야구의 세계화로 넘어갔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야구는 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5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결성된 아시아야구연맹은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주관했다. 경기는 1970년대 말까지 야구팬들에게 최고 관심사였다. 1954년 제1회 대회에서 한국은 필리핀, 일본에 이어 3위였다. 이후 세 차례 대회에선 2위와 3위를 오고갔다. 경기 내용이 훌륭했던 건 아니다. 1959년 도쿄 진구구장에서 열린 제3회 대회 1차 리그에서 선수단은 일본에 1-20으로 졌다. 이 경기에서 좌익수 박현식(작고)은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1963년 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을 5-2와 3-0으로 각각 꺾으며 5승1패로 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2차 리그에선 자유중국(대만)에 0-2로 졌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만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찌됐든 신용균, 서정리, 김응룡, 김희련, 박영길 등 이 대회 우승 멤버들은 올드 야구팬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한국은 이후 1971년 제9회 대회와 1975년 제11회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두 대회 개최지는 모두 서울이었다. 1975년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은 이내 세계무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21살의 신예 김재박(영남대)을 비롯한 대표 선수들은 그해 8월 야구선수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체력훈련을 하고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 대회에 출전했다. A조에 속한 한국은 3승4패로 니카라과와 함께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준결승은 불발됐지만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윤동균이 3할4푼8리(23타수 8안타)로 타격 7위에 올랐다. 김호중은 1.38로 평균자책점 3위에 자리했다. 이밖에도 많은 선수들이 부문별 성적에서 10걸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무대 정상에 오른 건 1977년 슈퍼월드컵(니카라과)이었다. 당시 선수단 구성은 꽤 화려했다. 김재박 전 감독, 유남호 전 감독을 비롯해 이선희, 최동원(작고), 김시진, 유종겸, 임호균, 심재원(작고), 김봉연, 김정수, 배대웅, 천보성, 윤동균, 이해창, 김일원, 장효조(작고) 등이다. 이들은 5년 뒤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대부분 스타로 거듭났다. 이 대회를 계기로 한국 야구는 세계를 바라보는 한편 프로화를 꿈꿨다. 이 같은 움직임의 발판은 물론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뒤에도 한국은 1983년 제12회 대회, 1989년 제15회, 1997년 제19회 대회, 1999년 제20회 대회에서 우승, 아시아선수권대회 통산 7회 우승 기록을 자랑한다. 최근 성적은 좋지 않다. 대만 타이중에서 벌어진 제26회 대회에서 한국은 또다시 우승에 실패해 10년 넘게 아시아 정상을 밟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1일 열린 한국과의 경기에서 4-0으로 완승하는 등 5연승을 내달려 통산 17번째이자 2003년 제22회 대회 이후 대회 최다인 5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은 대회에 신경을 꽤 기울이는 편이다. 2007년 타이중에서 열린 제24회 대회에선 호시노 센이치에게 지휘봉을 맡기기도 했다. 다르빗슈 유, 아베 신노스케, 무라다 슈이치 등 쟁쟁한 멤버들이 포함된 선수단은 김경문 감독이 이끈 한국을 4-3으로 누르는 등 3승으로 통산 15번째 우승을 거뒀다.
사실 프로 정예 멤버들이 나선 건 이 대회에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종목 출전권(1장)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베이징 직행 티켓을 손에 넣었지만 정작 올림픽 본선에선 고전을 거듭했다. 예선과 준결승에서 각각 한국에 3-5, 2-6으로 졌다. 동메달 결정전에선 미국에 4-8로 패했다.
2009년 삿포로에서 열린 제25회 대회는 올림픽과 무관했다. 일본은 투수는 호세이대학, 메이지대학, 긴키대학, 도카이대학 등 전원 대학 선수들로, 야수는 미쓰비시중공업, 혼다, 도요타자동차, JR 시고쿠 등 전원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선발, 한국을 7-1로 꺾는 등 3승으로 통산 1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선수 구성은 비슷했다. 한국전에서 활약한 선발 투수 요시나가 겐타로(와세다대학), 3회 2사 2루에서 2-0으로 달아나는 3루타를 날린 마쓰모토 아키라(JR 히가시니혼) 등은 대학과 사회인 선수들이었다. 반면 한국은 비주전 프로선수들을 중심으로 상무, 경찰청, 대학 선수로 대표팀을 꾸렸다. 성적은 기대 밑이었다. 지난달 28일 약체 필리핀에 고전 끝에 6-3 역전승을 거두고 2일 대만에 0-7로 지는 등 악전고투 끝에 3위에 그쳤다.
일본 축구는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뒤 ‘탈 아시아’를 선언했다. 이후 성적은 참담에 가까웠다. 아시아 지역 친선대회를 외면하는 등 거드름을 부리다 1998년에 이르러서야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예선 성적은 어땠을까. 일본은 한국과 3-3으로 비겼고 골 득실차에서 앞서 겨우 올림픽 티켓을 손에 넣었다.
‘기초 탄탄’, 이는 수험생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팬들조차 외면하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그렇다고 소홀히 봐선 큰 코를 다칠 수 있다. 여전히 한국 야구의 저변은 넓지 않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