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텔레비젼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남들 다 본 장면을 얼마 전 인상 깊게 지켜봤다. 다큐멘터리 속 늙은 사자는 하이에나에게 먹이를 빼앗기고 초원 한구석에서 쓸쓸히 스러져갔다. 사자의 최후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지만 또 다른 생명체인 기업은 어떤 과정을 통해 노화를 겪고 최후를 맞게 될까.
헬스케어 산업의 사자 화이자는 이런 질문에 비교적 명확한 답을 준다. 최근 화이자는 서울제약이란 소형 제약사의 제품을 수입해 파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 제품은 다름 아닌 자사의 대표품목 비아그라를 카피한 약이다. 혁신신약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던 화이자는 생존을 위해 체면과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화이자의 급격한 노화는 혁신의 단절에서 초래됐다. 화이자는 2006년 사운을 걸고 개발하던 신약 하나를 포기했다. '톨세트라핍'이란 이름의 후보신약은 1조원에 가까운 투자액을 삼키고 개발 막바지 단계에서 침몰했다. 이 사건은 화이자가 수년 내 제약업계 왕좌에서 내려오게 될 것임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다. 신약개발은 늘 실패의 위험성을 가진 것임에도 화이자는 톨세트라핍 외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후 화이자는 대표 품목 리피토ㆍ노바스크에 이어 비아그라까지 순차적으로 특허만료에 직면했다. 게다가 공격적인 한국 제약사들은 특허의 허점을 파고들어 복제약 발매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화이자의 몰락이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빠르게 진행된 배경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리베이트 쌍벌제, 대대적 약가인하 등 영업환경마저 악화됐다. 화이자는 이 부분에서도 전혀 혁신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느 제약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다 위기를 자초했다.
화이자의 몰락을 바라보는 국내 제약사들은 어떤 생각에 빠져있을까. 사자가 사라진 정글에서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눈치 외 별다른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까지 썩은 고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면 화이자가 주는 교훈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 제약회사들은 하이에나에서 작은 사자로 성장하는 단계에 와있다. 이들은 지난 20여년간 신약개발에 투자해왔고 수년 내 그 성과물을 시장에 내놓을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큰 성공을 거둬,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잡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화이자의 위세도 복제약 몇 개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그리고 그 배경엔 멈춰버린 혁신이 있다. 사자를 초원이 아닌 정글의 왕이라 부르는 것은 왕에게도 어김없이 정글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그래서 끊임없이 혁신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고 왕좌에서 퇴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뜻인지도 모른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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