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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서울]600년전 태조 이성계 왕십리 행차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45초

성동구 왕십리 일대 동명초등학교 왕자봉, 살곶이다리, 응봉산 등 태조 이성계와 관계된 지역 많아 눈길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지금부터 600여년 전 왕십리 일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야 고층 빌딩과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야산였다.


특히 이 일대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 도읍지를 정하는데 반드시 등장하는 지역이다.왕십리와 왕좌봉, 살곶이 다리, 매봉산 등은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밀접한 지역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왕십리...조선 왕조 도읍지 한양 기초점 =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를 세우면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위해 무척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왕십리다. 왕십리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도읍지를 전하기 위해 한양 지리를 두루살피다가 한 백발의 노인이 소를 타고 가다 채찍질하면서 "이 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꼭 무학과 같구나. 어찌 좋은 자리를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 다닐꼬"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스토리텔링서울]600년전 태조 이성계 왕십리 행차 왕십리 일대 중심지인 왕십리광장은 교통 요지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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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가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가르침을 청했다. 무학대사는 "노인장께선 소승이 무학이라는 것을 알고 말씀하신 것 같사온데 혹시 좋은 도읍지가 어디에 있는지 소승에게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자 그 노인이 "동북방으로 10리를 가면 명당 자리가 있을 것이요"하고 말하고 사라졌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에게 조선 왕조 도읍지를 알려준 노인은 산리말기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대사 영혼으로 죽은 지 수백년 후 나타나 무학대사에게 좋은 자리를 잡도록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북악산 아래 현 경복궁 자리에 도읍을 정하니 이 곳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한양이다.


무학대사가 도선대사를 만났던 곳을 '왕십리'(往十里) 불리게 됐다. 이런 연유인 듯 왕십리는 지금도 교통의 요지다. 성수대교 등을 통해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는 물론 지하철 2·5호선과 국철, 6일 지하철 분당선까지 개통되면 모름지기 왕십리 일대는 강남,북을 연결하는 서울 동북부의 중심지가 된다. 조선 태조왕의 행적과 뭔가 맞닿는 것같아 아이러니하다.

[스토리텔링서울]600년전 태조 이성계 왕십리 행차 동명초등학교 내 왕자봉터...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 곳에서 한양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한양 지역을 두루 살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왕자봉...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도읍지 살펴보던 곳=성동구 마장동에 가면 동명초등학교가 있다. 청계천 변 청계벽산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로 이 학교 안에 왕자봉 터가 있다. 지난 1981년8월15일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동명연혁고 성동구편에 보면 왕자봉은 동명초등학교 야산 봉우리로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 곳에 앉아서 도읍지로서 한양 지형을 살펴보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이 곳은 조선 왕조의 도읍지 탄생 현장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인 곳이다. 성동구 마장동주민자치위원회는 지난 7월 동명초등학교내 폭 950mm, 높이 500mm 규모로 왕자봉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지난달 25일 오후 이 곳에서 태어나 팔십 평생을 살아온 김정태씨(82)와 함께 동명초등학교를 찾았다. 그는 "지금은 이 곳이 별로 높지 않았지만 내 어릴 때 저 앞에 있는 지상 12층 높이의 서울시설공단 빌딩 보다 높은 산으로 무서워 잘 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이어 "이 곳 높은 산을 허물어 범람한 청계천변 둑을 쌓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 이 동네 이름이 왕재동으로 불렸다"면서 "동 이름으로 볼 때 아마 태조 임금이 이 일대에 애정을 갖은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스토리텔링서울]600년전 태조 이성계 왕십리 행차 1910년대 살곶이다리


◆살곶이 다리 =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있는 석조다리다. '살곶'은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을 몹시 미워해 함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태종을 향해 화살을 쐈고 그 화살이 태종이 있던 그늘막에 꽂혔다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강릉ㆍ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이 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했다.


1420년(세종 3) 세종의 명령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 공사를 시작했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교기만 세우고 중지했다가 63년 후인 1483년(성종 14)에 완성했다.길이 78m(258尺) 너비 6m(20尺)였다.

[스토리텔링서울]600년전 태조 이성계 왕십리 행차 태조 이성계가 매 사냥을 즐겨했던 응봉산


◆응봉산...매사냥 메카 = 조선 태조 이성계는 매사냥을 위해 즉위 4년(1395)에 응방을 한강 위 지금의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응봉산 일대에 설치했다. 태종ㆍ세종 때도 이 곳에서 매사냥을 즐겨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간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일대가 조선시대 매사냥의 메카였던 것이다. 박종일 기자 dream@




박종일 기자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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