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어무이(어머니)는 물때에 맞춰 바다로 '바래'를 나간다. 갯벌이나 갯바위에 앉아 소쿠리에 항거슥(가득) 해초류와 조개를 캐서 담는다. 굽어진 허리에 호미질이 힘에 부친다. 그러나 바다는 어무이에게 생명이자 가족의 생계다. 갯것들이 새비렀(널려있)지만 한 끼 찬거리만 소중히 담았다. 어무이는 그제서야 바다를 떠난다. 석양이 긴 그림자를 그리며 정지(부엌)까지 함께 한다.
경남 남해에 걷는 길이 생겼다. '바래길'이다. '바래'는 남해의 아낙네들이 팔 목적이 아니라, 제 가족 먹기 위해 바다로 나가 갯것들을 캐는 일을 말한다. 그러니 '바래길'은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갯것을 캐러 가던 그 길이다.
남해는 예부터 살림이 궁했다. 섬이라기보다 바다에 불쑥 솟은 산에 가까워 지금도 논과 밭이 산비탈에 기대어 있다. 이 가파른 비탈에 씨를 뿌렸던 흔적이 다랭이 논이다. 남해를 처음 찾은 사람들은 그런 다랭이 논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 색다른 풍광 뒤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에 스스로를 길들이며 살아온 남해인들의 삶이 녹아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파른 산기슭에 논과 밭을 일궈야 했고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바다로 나가야 했던 삶의 엄숙함이 곳곳에 스며 있다.
바래길은 그래서 남해사람들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길이다. 길을 걸을 때 눈 앞에 펼쳐진 바다에만 시선을 두지 말고 두 발 디디고 걷는 땅과 남해인들의 삶을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해안선 길이가 300㎞가 넘는 남해에 난 바래길은 모두 8개 코스다. 물론 새로 낸 길은 아니고 마을과 마을을, 포구와 포구를 잇는 길이다. 흐려진 길들을 다듬기는 했으되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8개 코스 중 다랭이 지겟길(1코스)와 앵강 다숲길(2코스)를 걸었다. 1코스가 바래길의 본령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면 2코스의 주인공은 앵강만이다.
송홍주 남해 바래길 대표와 남해가 좋아 정착한 부산 아지매 정옥희 시인이 길동무를 자청했다.
1코스와 2코스를 가르는 경계가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가천마을 왼쪽으로 평산항까지 16㎞ 길이 다랭이 지겟길이고, 오른쪽으로 벽련마을까지 18㎞ 길이 앵강 다숲길이다.
# 다랭이 지겟길-척박한 자연환경에 기대 살아온 생명길
들머리인 평산항에 섰다. 바래길 안내판을 끼고 마을언덕에 오르자 남해바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편도 5시간짜리 코스의 시작이지만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발걸음이 경쾌하다.
한 구비 돌자 마늘밭과 다랭이논, 쪽빛바다가 다가온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의 어머니처럼 길도 장식 없이 수수하다.
송 대표는 "인공미는 전혀 없고 오로지 남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자연 그대로의 길"이라며"아기자기한 해안에 펼쳐진 몽돌해변과 갯벌, 그리고 상쾌한 숲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다."고 자랑을 쏟아낸다.
길은 줄곧 해안을 끼고 들고난다. 바다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는 자그마한 언덕을 넘고 마늘밭의 둑을 지난다. 숲길을 지나기도 하고 백사장을 따라 걷기도 한다.
유구와 사촌, 선구와 항촌을 잇는 해안에서는 잘그락 거리는 몽돌 소리가 귀는 물론 마음까지 정화시켜 준다.
'흔한 몽돌이지만 가족 있는 저를 데려가지 마세요' 몽돌을 주워가는 여행객들에게 던지는 애교어린 간판에 마음이 짠하다.
바래길에서는 자주 뒤를 돌아다봐야 한다. 다른 길과는 달리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걸어온 길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해안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율동을 거듭하며 걸으니 지나와 뒤로 밀려난 길들을 돌아보면 바다쪽으로 들고나는 길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고 보면 다랭이 지겟길은 우리네 어머니 시절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며 그 정을 그리워 하는 길이다. 걸으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문득 문득 사무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1코스의 끝은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바다로 뚝 떨어지는 비탈에 100여층의 논이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여행자에게는 봄부터 가을까지 초록과 황금빛으로 물드는 다랭이 논 풍경으로 유명하다.
# 앵강 다숲길-숲과 바다가 연출하는 자연을 내 품에
가천 다랭이 논과 바다가 만나는 언덕배기 정자에서 앵강 다숲길이 시작된다.
길은 남해 앵강만(鸚江灣)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로 곁에 두고 즐기며 걷는 숲길이다.
가천마을에서 15분 정도 길을 걷자 깍아지른 절벽 옆으로 섬 깊숙히 파고든 앵강만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길을 돌아섰다. 와~ 감탄사와 함께 무릅을 치게 만드는곳이 나타났다. 앵강만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마련된 조그만 쉼터다. 나무의자에 앉았다. 남해바다를 내 품에 안는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앵강만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다. 앵무새가 우는 강, 다시 말해 앵무새 우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바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앵강만은 잔잔하고 평화롭다. 앵강마을을 바라보는 해안가 마을도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남해바다가 그린 그림의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편안하게 한다"면서"숱하게 이 길을 오고 가곤 했지만 걸을 때마다 정말 매력적인 길"이라고 정 시인은 자랑한다.
그녀의 말대로 길은 걷는 내내 숲과 바다가 연출하는 자연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연노래를 들을 수 있고, 깍아지른 기암절벽 틈새로 하얀포말을 만들고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
숲과 바다,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진 앵강 다숲길, 한 뼘 한 뼘 사람이 빚어낸 길을 걸으며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사는 법을 마음으로 느껴진다.
종착지인 벽련마을 앞두고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드넓은 앵강만의 바다가 두 팔 벌려 안아줄 듯 파란 미소를 지어보인다.
남해=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익산IC에서 포항익산고속도로를 약 10㎞ 탔다가 순천완주고속도로로 진입해 순천IC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탄다. 이 길은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 경로보다 한 50여분 단축할 수 있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11km만 가면 남해대교다. 여기서 남해읍까지는 30분이 안걸린다.
남해 바래길 사무국은 여수 엑스포 기간에 맞춰 5월12일부터 7월 7일까지 토요바래길걷기 투어를 운영한다. 사전예약. 남해 바래길 인터넷 카페(cafe.daum.net/baraeroad), 홈페이지는 4월말경 오픈(http://baraeroad.co.kr). 바래길 사무국 055-863-8778. 남해군문화관광과 055-860-8614.
△먹거리=남해의 맛이라면 단연 멸치다. 이즈음 한창 제철이다. 죽방멸치로 유명한 삼동면 지족리를 비롯해 남해에는 멸치회, 멸치찜 등을 내놓는 식당들이 많지만 맛은 비슷비슷하다. 남해읍 전통시장안에 있는 복례횟집(055-863-5939)은 쌈을 사먹는 멸치정식이 맛깔나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