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2011년 12월, 축구팬들은 경악했다. 1년 여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광래 전 감독이 하루 아침에 경질됐기 때문이다. 해임 과정이나 배경, 모양새가 매우 좋지 않았다. 축구계는 의혹과 비난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더욱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최강희 감독이 차기 사령탑으로 결정된 후 시끄러웠던 분위기가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일순 잠잠해졌다. 그가 전북 현대 감독 시절 '닥치고 공격(닥공)'을 그리 강조하더니, 그야말로 '닥치고 정리'가 된 느낌이랄까. '최.강.희' 이름 석 자에 어떤 마력이라도 있나. 최강희 감독은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스포츠투데이와 가진 취임 인터뷰에서 "워낙 경질 과정이 좋지 않아 그랬을 뿐, 누가 와도 금방 분위기가 수습됐을 것이다. 나야말로 넋 놓고 있다가 우승 기쁨은 하나도 못누리고 고민만 잔뜩 생겼다"며 껄껄 웃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인 대표팀 감독, 참 무거운 이름
"아직도 저는 불편합니다. 동네에서 계속 이장을 했어야 하는데..(웃음) 대표팀 감독이 참 무거운 자리네요. 그래도 대표팀에 뽑을 선수들 명단을 추려보니 자신감이 생기대요. 역시 한국 축구 괜찮구나, 했어요."
'봉동 이장' 최강희 감독은 지난달 22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2013년 6월까지만 하겠다.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계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축구협회 관계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사전 협의도, 조율도, 언질도 없던 폭탄 발언. 그는 늘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했다. 그런 그조차도 '대표팀 감독'이라는 자리가 낯설고 부담스럽다. 하지만 '운명론→긍적적인 마음→자신감'의 '심경 3단 변화'를 거치며 이젠 얼굴에 편안함이 실렸다.
"이기면 한 시간 좋고, 우승하면 하루 좋고, 그 다음날 되면 내년 걱정하는 게 감독입니다. 승부사가 되려면 스트레스에서 빨리 벗어나 즐길 줄 알아야 하죠. 아직 한 경기도 안해봤으니 저도 이런 멘트 할 수 있겠죠? 허허허."
◇깜짝 발탁은 없다
이 시간 현재 최강희 감독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날짜는 '2012년 2월29일' 단 하루다. '최강희 호'는 그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쿠웨이트와 2014 브라질월드컵 3차 예선 마지막 경기를 갖는다. 이기거나 비기면 최종예선 진출. 패하면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커녕 아시아 최종예선 무대도 밟지 못하는 굴욕을 안게 된다.
벼랑 끝에서 축구협회는 최 감독에게 허겁지겁 앞치마 두르고 칼자루 쥐어주고선 "폼 나는 요리 좀 만들어보라"고 주문한 꼴이 됐다. 조리대 위의 재료도 사실 최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최 감독은 "처음엔 걱정됐다. 하지만 찬찬히 보니 재료들도 나쁘지 않더라. 이제 요리 방법이 문제다. 깨진 분위기와 발란스를 잘 추스르고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최강희 감독은 "깜짝 발탁은 없다. 이럴 때일수록 무조건 경험 많은 베테랑을 써야 한다. 이기는 경기를 위해선 실험은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 톤 높여 이어간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쿠웨이트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쿠웨이트 걱정하면 브라질 갈 생각 하지 말아야죠.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는데..한 경기에 목을 매고 걱정해요? 그럴 바엔 차라리 다 포기하고 2018년 준비하는 게 낫지요."
◇이동국, 서로 보기만 해도 좋다
작년 가을, 축구팬들의 가슴을 짠하게 했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바로 박주영(아스널)이 UAE와 월드컵 3차예선 3차전서 선제골을 터뜨린 후 환호하는 모습을 이동국(전북)이 코너플래그 밖에서 교체멤버 조끼를 입은 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사진. 그 한 장의 컷은 당시 대표팀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최 감독은 "코칭스태프 선임하고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 사진 얘기부터 꺼냈다. 우리 이런 팀은 만들지 말자고. 대표팀 선발 후 첫 상견례 때 그 사진을 구해 선수들에게 보여줄 예정이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동국이에겐 가슴 아픈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골을 넣으면 23명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좋아해야 한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해야 한다. 참 의미가 많은 사진이다"고 했다. 혹시 그 사진을 보고 이동국을 나무라진 않았을까.
"동국이요? 전북에 데려온 후 첫 1년 간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면담을 하지 않았어요. 서로 믿는 거죠. 오래된 선수들은 알아요. '아, 이 아저씨가 나를 믿어주고 있구나!' 굳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는 거죠. 동국이랑은, 서로 보기만 해도 좋아요." 최강희 감독의 마음 속엔 이미 이동국은 대표팀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자리하고 있다.
◇닥공? 닥수? 닥발!
닥공. 최강희 감독이 고안한 이 화끈한 전술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무대까지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전북의 '닥공'을 성공 사례로 소개했다. 전북은 이 미묘한 느낌을 영어로 어떻게 옮길까 고심하다 '셧업, 어택(Shut up, Attack)'이라고 표현했다. 최강희 감독은 대표팀에도 자신의 히트상품인 '닥공' 브랜드를 입힐까.
"닥공은 무조건적이고, 무리하고, 무모한 공격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한 방법이죠. 하지만 전북의 팀 상황, 선수 구성 등을 고려해 오랜 시간 생각해서 만들었고 또 잘 됐어요. 그러나 대표팀에서 쓰기엔 위험합니다. 전체적인 발란스를 고려해야 하거든요. 안정적인 조직력 위에서 좋은 자원을 갖고 공격적인 전술을 펴는 게 중요하죠."
"그렇다고 '닥수'(닥치고 수비)를 할 수도 없고.." 라며 잠시 말을 끊은 최 감독에게 공수 발란스를 수차례 강조하시니 '닥치고 발란스'는 어떠냐고 묻자 "닥발이요? 그것도 말이 되네요"라며 껄껄 웃는다. 그리고 하는 말, "어쨌든 쿠웨이트 전에서 닥공했다가는 저, 집에 가야합니다"
스포츠투데이 조범자 기자 anju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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