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정권 말 관료들은 양치기 소년이 될 뿐이에요. 여의도로 넘어가 누더기가 되고 있는 세제와 예산안을 보세요. 정책에 무게감이 없습니다. 5년마다 찾아오는 개점휴업 시즌이지요." 28일 오후 "여야의 대치로 또다시 국회에 다녀만 왔다"던 한 관료가 건넨 말이다.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권의 복지 전쟁이 뜨겁다. 27일엔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복지예산 3조원 늘리기'를 약속받았고, 28일엔 당정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9만7000명을 사실상 정규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했다. 예산 증액이든 복지 확대든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것'을 단서로 달았지만, 임기 말 청와대는 선거를 준비하는 여당에게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2013년으로 못박았던 균형재정(관리대상수지 적자를 면한 상태) 계획도 저만치 멀어졌다. 주중엔 일명 버핏세로 불리는 개인소득세 최고세율 인상안이 당정청 합의로 결정될 전망이다.
헷갈린다. 이게 야당의 목소리인가, 여당의 목소리인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증세와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야당을 향해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증세에 따른 소비와 투자 위축'을 꼬집어온 그 여당 맞는 건가. 한국판 버핏세 주장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세우던 그들 맞는 건가.
미국에선 새해 예산안을 '대통령 예산(프레지던트 버짓·president’s budget)'이라 부른다. 재원을 나눈 모양새에 따라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엿볼 수 있어서다. 하지만 내년도 예산이 '이명박 예산'이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MB노믹스(이명박 대통령)'의 인큐베이터가 됐던 한나라당이 나서 대통령의 철학이 담긴 세제와 예산안에 찍찍 빨간줄을 긋고 있다. 관료들은 스스로를 '양치기 소년'이라 부르며 납작 엎드렸다. 정책결정권자의 의지를 담아 입안은 하지만, 감세에서 증세로, 긴축에서 확대로 자고 일어나면 국정철학이 바뀌어 버리는 지금, 정부발 정책은 '페이퍼'에 불과하다고들 소근거린다. 국민들은 헷갈린다. 여야가 한 목소리를 내버리니 내 표를 누구에게 줘야 살림살이가 나아질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복지 경쟁이 벌어지는 사이 나라 곳간은 비어간다.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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