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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후보 인물탐구]野 통합후보 박원순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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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사나이

[아시아경제 김달중 기자] 제1야당의 조직력을 무력화시키며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통합후보로 선출된 무소속 박원순 후보는 1956년 경상남도 창녕의 한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경복고에 시험에 한 차례 떨어졌던 그가 서울 경기고를 목표로 재수할 당시 3개월 동안 양말도 안 벗고 공부할 정도로 학업을 통해 인생을 변화시키려는 애착이 강했다.


고교 3학년 때에는 늑막염에 걸린 탓에 1년을 쉬어야 했다. 남들보다 2년 늦은 1975년에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 1학년 입학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화여대 학생과 미팅 약속이 있었던 5월22일.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 지켜본 경찰의 진압 모습에 발걸음을 시위대열로 향했다. 입학 3개월 밖에 안 된 '새내기'로 단순가담에 불과했지만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로 4개월 복역과 제적이라는 엄벌에 처했다.

'유신'은 그렇게 평범했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복학을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76학번으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뒤 곧바로 사법시험에 몰두했다. 1980년 사시 합격(22회)에 합격해 대구지검 검사로 1년여 근무하다가 법복을 벗었다. 그는 훗날 탄탄대로인 검사직을 그만 뒀던 이유에 대해 "사형 집행 참관이 싫었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인권변호사의 길로 방향을 전환한데는 조영래 변호사의 영향이 컸다. 조 변호사는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학생운동권의 전설이었다. 박원순은 훗날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라는 책에서 조 변호사를 '인권변호사의 전설'이라고 표현했다. 변호사로 개업한 뒤 공안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조 변호사와 함께 뜻이 있는 인권변호사들을 모아 '정법회'(1986)를 결성했고, 이 모임은 2년 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립으로 이어졌다.


박원순은 개인의 재산 축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부(富)'에는 무능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역사문제연구소가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에 빠지자 저당 잡힌 건물을 개인의 부채로 떠안고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 문제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집을 잃어야 했다.


이처럼 자신의 재물 축적에 무능했던 반면, 기부와 기증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멘토'였던 조 변호사가 사망(1990)하자 영국과 미국으로 떠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했다. 1인 시위라는 새로운 문화를 고안했고, 낙선 운동, 소액주주 권리찾기,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을 주도하며 시민사회운동의 '대부'로 자리를 잡았다. 참여연대가 자리를 잡자 사무처장직에서 물러나 아름다운재단(2003), 희망제작소(2007)를 만들며 새로운 시민활동을 전개해왔다. 2011년에는 시민운동에서 서울시장을 목표로 야권의 통합후보에 선출되면서 정치인이라는 또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다.




김달중 기자 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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