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커피, 그리고 패션 잡지
[아시아경제 박지선 기자]프랑스 파리 시내 '가판대'는 꽤 근사한 공간이다. '키오스크kiosque' 라 불리는 이곳은 얼핏 보면 기둥같다. 그 공간에서는 버스와 지하철 승차권, 사탕과 껌, 담배, 엽서, 신문과 잡지, 그리고 꽃다발 등을 판매한다. 미니 편의점같다.
새로운 패션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가판대를 장식한 잡지 조차 특별해 보일 때가있다. 깡마른 여성 모델은 새빨간 립스틱과 부풀린 머리를 하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종이에서 튀어나올 듯하다. 초콜릿 복근과 살아있는 턱선이 아찔한 남성 모델은 똑바로 쳐다보기 민망하다. 신상품 전시장이자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이 가득한 잡지는 유행 그 자체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그렇게 파리를 호흡하던 내 앞에 프랑스 할머니가 최신호 패션 잡지를 계산하고 가판대 뒤쪽 카페에 앉았다. 할머니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방금 구입한 잡지를 테이블에 펼쳤다. 할머니의 옷차림은 그다지 '패셔너블'하지 않았다. 패션 잡지 속 모델과 현실의 할머니는 철저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주름진 할머니의 피부도 그랬고, 할머니가 들고 있던 낡은 가방도 그랬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옷차림은 정갈했다. 다시 살펴보니 화려한 머리띠는 사랑스럽고 핑크빛 립스틱도 생기있어보였다. 나는 그렇게 할머니를 염탐했다.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최신호 잡지를 '어렵게' 넘겼다. 할머니의 무뎌진 손끝으로 넘기기에 잡지 종이는 한없이 얇고 하늘거렸다. 잡지를 보는 할머니 표정은 꽤 진지했다. 할머니의 그 몸짓은 파리의 이국적인 요소들과 묘하게 어우러
자연스동시에 오버랩되는 풍경이다.
한때 ‘청담동 며느리 룩’이 유행했었다.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와 무릎 길이 검은 치마. 단정하게 묶은 머리, 3cm 낮은 굽의 구두. 유행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대동단결이 잘 되는 대한민국 여성의 특성을 잘 표현한 키워드였다.
10여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한 디자이너는 "과연 내 옷이 한국에서 팔릴까요? 모두 무채색에 똑 같은 스타일을 입고 있는데, 마치 유니폼 같군요. 내 숍에는 재고만 쌓이는 게 아닐까요?" 그 디자이너는 핑크컬러와 레이스 등을 다채롭게 활용한 의상을 선보이는 디자이너 질 스튜어트였다.
이제 한국은 세상의 모든 유행이 시작되는 곳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영토가 됐다. 남과 다른 개성을 찾으려는 여성이 늘었고, 그런 여성을 위해 옷을 짓는 디자이너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주부의 길을 걸었던 과거의 그녀에게 옷과 화장, 액세서리는 중요하지 않았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결혼을 해도 직장에 다니는 아줌마가 많아졌고, 20대 직장여성을 위한 브랜드 못잖에 중년을 위한 브랜드 매출이 훨씬 높아졌다. 골드미스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겼고, 손자가 있어도 젊게 살겠다는 예쁜 할머니들도 많아졌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한국 여성들은 대한민국 패션을 다양하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나는 파리에서 본 할머니의 풍경을 한국에서도 마주하기 기대한다.
그 때, 파리에서 할머니와 패션 잡지 조합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양성 때문이었으리라. 할머니의 오래된 옷은 젊음과 쇼핑의 거리 샹젤리제에서도 통했다. 어머니가 버리지 못한 오래된 백과 나의 20년 된 재킷이 압구정 한복판을 활보하고 청담동 카페 거리와 조화를 이루는 때, 지금 보다 더 주름이 많아지더라도 패션을 추억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스타일부장 박지선
박지선 기자 sun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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