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9일 오후 2시 부산저축은행 박연호 회장의 1심 마지막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 재판장의 시선이 힘겹게 버티고 선 중년의 여인을 향했다. 흐느낌이 배인 목소리가 여인의 목을 타고 한음절씩 흘러나왔다. 재판장이 귀를 기울인 이 여인은 검사도, 피의자도, 변호인도, 증인도 아닌 부산저축은행 예금 피해자 비상대책위원장 김옥주(50ㆍ여)씨였다.
재판 관계자가 아니고선 발언권을 얻는 게 거의 불가능한 법정에서 일개 방청객이 발언권을 얻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 염기창 부장판사는 공고한 원칙을 깨고 이례적으로 방청객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이번 사태의 해악이 얼마나 큰지, 피해자들의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법원 깊숙한 곳까지 퍼져있는 분위기였다.
"정식 증인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씀을 해보세요"라는 염 부장판사의 말에 김씨는 "억울함을 풀고 돈을 찾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염 부장판사의 배려 속에 김씨의 토로는 이어졌다. 그는 "사람을 한 명만 죽여도 사형ㆍ무기징역인데 이들은 부산시민 2만5000명을 학살한 것"이라며 "지난 2008, 2009년에도 친인척을 동원한 차명차주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관련 불법대출을 해 문제가 됐던 대주주ㆍ경영진들이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는 피고인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피고인들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형편의 사람들이 넣은 돈으로 비싼 변호사를 사서 자기들만 빠져나가려 한다"며 "양심이 있다면 그 돈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지난달에는 첫 번째 공판준비기일을 방청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50여명의 예금 피해자들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을 찾아가 몸싸움 등 격렬한 항의 끝에 담당 변호사들이 사임하기도 했다.
이례적으로 피해자에게도 진술권을 부여한 염 부장판사는 "피해자가 워낙 많고 그들의 울분을 표현할 마땅한 통로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보게 됐다"고 말했다. 대개 피해자에 대한 진술 기회는 피해자 진술이 공소장에 기록됐거나, 피해자가 탄원서를 제출한 경우 정식 절차를 거쳐 증인으로 채택된 경우라야 부여된다.
염 부장판사는 "빠른 재판만이 능사는 아니다"며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릴지라도 기록만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 피의자의 방어권과 피해자의 진술권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진행될 공판기일 때도 상황을 고려해 피해자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염 부장판사는 다만 "피해자들의 집단행동이 증인에 불과한 일부 (부산저축은행의) 직원들을 위축되게 하거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며 피해자들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의견을 개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이날 공판준비기일에선 대주주의 신용공여에 대한 심리가 이뤄졌다. 변호인의 변경으로 인해 아직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일부 피고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추가로 3명의 증인을 채택하는 것을 끝으로 공판준비기일을 모두 마치고, 다가오는 23일 오전 10시 첫 번째 정식 공판을 열기로 했다.
정준영 기자 foxfury@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