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첫 스타트는 잘 끊은 것 같아요. 더 열심히 공부해서 관객과 완벽하게 교감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습니다.”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발레극 ‘지젤 Giselle’에서 타이틀 롤을 완벽하게 소화한 발레리나 서희 씨(25)의 말이다. ABT는 볼쇼이발레단, 키로프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 파리 오페라발레단과 함께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서양 예술인 발레에서 동양인이 지젤 역을 맡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2006년 ABT에 입단한 서 씨는 작년 8월 단역 ‘코르드발레’에서 독무를 출 수 있는 ‘솔로이스트’로 승급하며 급속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젤’은 발레리나라면 누구나 연기하기를 꿈꾸는 작품으로 서 씨의 꿈 역시 ‘지젤’이었다. 서 씨가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발레리나 중 한 명인 ABT의 대표 발레리나 줄리 켄트 역시 ‘지젤’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난 5년 동안 서 씨는 아무런 동작 없이 왕비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시녀부터 군무까지, ‘지젤’ 역만 빼고 모든 역할을 두루 소화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프리마돈나 ‘지젤’로 무대에 설 것이라 권토중래했다.
L. 들리브의 ‘코펠리아 Copellia’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발레의 대표 격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지젤’은 낭만주의 시인인 고티에가 시나리오를, 아돌프 아당이 음악을 작곡했다. ‘발레의 햄릿’으로 불릴 만큼 주인공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가 인상적이며, 춤이 섬세하고 서정적인데다 감정 표현이 쉽지 않아 최고 수준의 발레리나들만이 ‘지젤’ 역으로 등장해 왔다. 또한 1막과 2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젤’은 고난도의 퍼포먼스에 주인공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력까지 발레리나에게 요구하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와 함께 ‘지젤’이 발레리나의 로망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ABT가 불과 1년 전만 해도 단역 발레리나였던 서희에게 지젤을 맡긴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이날 공연은 치명적인 발목 부상을 이겨낸 서 씨가 처음 선보인 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다. 지난해 ‘호두까기 인형’의 주인공인 클라라 역 데뷔를 앞두고 있던 서 씨는 연습하던 중 발목 인대를 다쳤다. 의사는 그에게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만 서 씨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6개월 동안의 혹독하고도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을 이겨내고 빠르게 회복한 서 씨는 그토록 원하던 지젤 역으로 발탁됐다.
“모든 공연이 다 특별하지만 오랫동안 너무 하기를 원했던 작품이어서 더욱 특별하다”고 말하는 서 씨는 “워낙 대작이라 긴장했는데 첫 작품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이날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메운 3000여 명의 관객들은 모두 기립하여 커튼 콜에 나선 그에게 박수갈채를 선사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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