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ㆍ정ㆍ아 ! 그녀가 우리를 향연에 초대했다. 자리는 객석이다. 그녀는 칙칙한 조명과 흐느낌이 가득한 무대의 한 복판에 홀로 옷을 한꺼풀씩 벗어 나간다. 그녀가 은밀하고 끈적일수록 객석의 우리는 더 많은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우리와 더불어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또 있다. 권력자들이다. 일단 흥행은 이뤄졌고, 다들 모였다. 그런데도 이 향연은 비극이다. 주연은 재기불능의 만신창이가 되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잔치가 시작됐다. 음악소리가 커지고 쾌락이 춤춘다. 그녀와 우리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욕망이 불탄다. 잔치가 쾌나 화려하다. 단상 밑의 우리는 그녀의 춤사위를 '관음의 장사꾼'으로, '도덕적 이중성의 폭로자'로도 바라본다. 일단 그녀는 향연을 멈추지 않을 태세다. 언론과 권력도 파티를 즐기고 있다.
그녀는 왜 스트립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
그녀는 혼자만의 고독한 공간인 스테이지와 은근한 불빛, 그 아래 침 흘리며 즐거워하는 관중들...쇼는 가학적 시선의 욕망과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사디적 인내가 동시에 작동한다.
보려는 것이나 보여주는 것이나 시장에서는 변칙적인 향연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즐긴다. 특히 힘센 권력자들의 사생활이라면 한마디로 장사가 된다. 신정아, 그녀는 지금 스트립 걸보다 비싸게 팔렸다. 그녀는 관음의 시대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역사상 최고의 관음의 대상였던 '클레오파트라'도 지금은 경쟁이 안 될 지경이다. 인터넷 보급 초기 어느 여배우의 비디오보다도 더 강렬한 데가 있다. 우리는 이 상품을 사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헌데 이상하다.그녀가 즐거움을 선사하고, 우리는 돈을 지불했음에도 박수치는 사람이 없다. 심장에 들끓는 욕망을 표출하는 대신 조롱과 멸시, 집단적인 이지메를 안긴다. 관람석의 우리들 중에는 신정아식 '관음'에 몹시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보여주기 혹은 보기, 즉 관음이 갖는 성격은 성애의 세계에서 변칙적인 향연이다. 더우기 드러내놓고 여럿이 보고 즐기는 행위로서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마조와 사디가 혼재돼 있다. 성애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에서 무화과를 따먹은 이후 수치심으로 바꿨다. 그래서 은밀하다. 은밀해서 보여주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성애의 규칙이다.
사람들이 밥 먹는 것에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지는 않는다. 또 게걸스럽게 먹든, 과식을 하든 그다지 참견하지도 있는다. 밥 먹는 걸 보는 것이나 보여지는 것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혼자 먹든, 여럿이 먹든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은 다르다. 도덕파괴론자나 자유주의 신봉자들조차 식당에서 밥 먹듯이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성행위라면 대상이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을 마음껏 가질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코 자유로운 세상이 온다해도 성(性) 본능에 대해서는 어떤 제약, 장애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것, 보여지는 것이 다 금지돼 있다.그러나 오늘날 관음이 판친다. 욕구는 곧 시장이고 산업이다. 실제로 스티립쇼, 누드사진, 성을 차용한 광고, 각종 이미지 등이 공개된 영역에서조차 횡행한다. 그래서 보여주려는 사람과, 보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시장이 열렸다.
누가 왜 금지된 영역을 산업으로 육성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관음'의 욕구는 날로 커지는 듯 하다.
눈의 욕망..관음..마조히즘과 사디즘의 교차점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만성적인 욕구불만과 싸운다. 금지, 터부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우리가 애로티시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종족 번식을 제외한 성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성애의 방법은 많다. 그 방법에 대해 오늘날 취향의 문제로 다루려는 움직임도 있다. 동성애나 양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등은 물론 변태적인 행위까지도 그러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인 사랑에도 미적인 옷을 입힌다. 연애의 정열 또한 관대한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관음증은 남성의 욕망을 위주로 한다. 남성들의 권위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욕망이 번뜩이고, 여성들이 수동적인 형태를 갖는다. 거리에서도, 영화관에서도, 스트립쇼장에서도 성의 기호가 깔려 있다. 따라서 남성들은 '보는 역할'을 하고 여성들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사실상 관음증은 권력의 지배와 피지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관계라면 언젠가 전쟁 한판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행동하는 여성과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많아지면 관음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변태적인 행위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거세 컴플렉스, 선망과 향수, 불안정성, 고독감, 나르시즈, 파괴 충동, 등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통제해야하는가, 개방해야하는가의 문제를 뛰어넘지는 않는다. 시간과 장소, 대상, 방법을 불문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 신정아의 향연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또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신정아 혹은 신정아의 연인들이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며 반칙을 저질렀다고 여긴다. 실제로 정황도 드러난다. 신정아가 여성성을 매개로 출세와 부, 권력을 가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한다. 그녀의 자서전은 이런 의심을 더욱 불 지핀다. 반칙을 순화시키기 위해 그저 지저분한 스캔들을 '관음'이라는 대중적인 먹거리로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내놓은 관음이라는 상징은 남성 중심사회의 음습하고 비열한 욕구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무작정 돌을 던질 수만은 없게 하는 이유다.
이규성 부동산 부장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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