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공식석상에 선 두 경제원로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여든 다섯이 됐으면 좀 편해질까 했는데…"
지난 22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2011 포스코청암상 시상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박태준 이사장(포스코 명예회장)에게 기자들이 "한국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 및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를 질문하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혼자말을 한 뒤 걸어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됐고, 정준양 포스코 회장 등 후배들이 동석한 자리인데 아직도 자신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으냐는 의미였다. 기자들의 성의를 못이긴 듯 전자의 질문에는 "요즘 정도면 좋은 것 아닌가", 후자는 "단편적으로 볼게 아니라 종합적으로 봐야할 것"이라는 짤막한 답을 한 뒤 자신의 차를 타고 빠져 나갔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 부암동 AW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대우창립 44주년 기념식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5개월여 만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귀국해 300여명의 '동지'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지난해 43주년 기념식과 달리 김 전 회장은 깜짝 연설도 하지 않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기념식중 김 전 회장은 전 대우합창단이 가수 송창식의 '우리는'을 부르던 가운데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로 이어지는 가사를 듣자 감정에 북받친 듯 눈물을 보였다.
이날 박 명예회장과 김 전 회장 모두 말을 최대한 아꼈다. 다만 박 명예회장은 할 말을 다 안했고, 김 전 회장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최근 발언 사태를 목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두 사람은 간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박 명예회장의 "종합적으로 봐야할 것"이라는 말은 핵심이 되는 단어 자체에 대한 해석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바둑기사가 바둑알을 한 점 놓을 때 그로 인해 발생할 상황을 모두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 당사자 모두의 실익을 따져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동반성장이나 초과이익공유제를 비롯해 정부와 기업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과 계획을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의 눈물에는 서서히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는 '대우'의 운명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 기업가정신, 글로벌화는 한 때 대우를 지칭하는 상징이었다. 5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온 그로서는 '대우가 지금까지 건재했다면 한국경제의 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을지도 모르겠고, 아마 그 답을 알고 있기에 김 전 회장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경영 일선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난 두 사람을 보기 위해 이날 행사장에는 수백명이 몰렸다. 최근 재계가 2세에서 3세 중심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임을 놓고 볼 때 1세대를 보기 위해 기꺼이 저녁시간을 할애한 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경제가 발전해 삶의 질은 높아졌고, 통신이 발달하고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똑똑한 인재도 많아졌지만 아직도 두 원로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리더십 때문으로 보인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할아버지가 집안의 모든 의사결정을 좌우했던 대가족 시절에는 할아버지의 말은 곧 진리였다"며 "1위 기업 삼성이 이건희 회장 복귀 이후 결속력이 강화된 것처럼 다른 기업들도 지금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창업주 또는 1세대에게 구하고 싶은 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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