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대한민국의 창의영토를 넓히는 세 번째 주인공으로 한국과학창의재단과 함께 선정한 사람은 건축가다.
한울건축의 이성관(63)대표를 찾아갈 때만 해도 기자는 웅장한 건축물을 떠올렸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해마다 대한민국의 각종 건축상을 휩쓸며 23년째 한울건축을 이끌어왔다. 지난해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을 통해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건축상 최우수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제1회 김종성건축상을 수상하면서 화제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거창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늘 새로운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작품은 '일상의 뒤집기'를 통해서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고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누구도 보지 못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색다른 감동을 받을 것이다. 멀리까지 가서 찾아낸 풍경은 그 희소성 때문에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매번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달리 보기 시작하면 된다. '일상 속에 숨겨진 비일상성'의 발견이 그것이다.
양평에 위치한 이성관 건축가의 전원주택에는 모두 16마리의 개들이 살고 있다. 이성관씨는 있는 재료를 활용해 일일이 조립할 필요가 없는 개집을 만들면 어떨까 고민하다 '하수관'을 떠올렸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개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생각할수록 하수관은 개집 만들기에 적격이었다. 입구와 창문을 뚫고 바닥을 나무판자를 대 평평하게 만들어주니 금방 근사한 개집이 만들어졌다.
돈은 적게 들면서 만드는 노력도 최소화할 수 있고, 16마리 개들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게 됐다. 그는 "많은 돈을 들여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건 오히려 쉽다"면서 "우리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물들을 다른 공간으로 끌어와 다른 용도로 활용하면 뜻밖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그의 머릿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까? 이 대표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겠다고 하는 건 아니다"며 웃어보였다. 그는 "다만 어릴 적부터 무엇을 보든 '왜 이래야만 하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나?' 하는 생각을 달고 다녔다"고 말했다. 눈에 비치는 것보다 그 이면을 캐길 좋아하는 성격이 모든 것을 뒤집어보는 습관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그는 "신윤복이 그린 <야행>이라는 작품을 보면 두 남녀가 담벼락 밑에서 만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 하늘에 떠 있는 달 모양을 두고 밤인지 새벽인지 논란이 됐다"며 "나는 그 달의 모양을 보고 낮달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낮에도 가끔 볼 수 있는 달을 관찰하면 그림에서처럼 위로 차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림의 제목이 <야행(夜行)>이고, 두 남녀가 담벼락 밑에서 몰래 만나는 장면은 당연히 밤을 연상시킨다. 그는 "그림 속의 달은 분명 낮에 볼 수 있는 모양이지만, 사람들은 고정적이고 한정된 맥락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한다"고 덧붙였다. 과감하게 고정된 틀을 벗어나서 뒤집어보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데도 말이다.
이런 습관은 실제 그의 건축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불교계의 대표적인 고승인 탄허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에 가면 갑자기 벽 전체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벽이기도 하고 동시에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문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벽이나 문과는 확연히 다르다.
높이 2.1m, 너비 7.5m의 거대한 벽 전체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이렇게 벽을 들어올리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바로 연결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건물 바깥의 연못과 대나무숲, 그리고 하늘이 건물 내부와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진다. 건물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 있는 것처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 역시 익숙한 옛 것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면서 시작됐다. 그는 "옛 선조들은 여름이면 문을 들어 올려 수직이 되게 걸어두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곤 했다"며 "한옥에서 문을 들어 올리면 기둥이 남지만 현대기술은 기둥도 필요 없이 벽 전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옛 선조들의 한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이를 현대건물에 적합하도록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재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는 외벽을 만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처음에 창호업체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지금껏 이런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어떻게 하면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의 머릿속에 비행기 격납고가 떠올랐다.
비행기 격납고에는 지금 만들고자 하는 문보다 더 큰 문들도 많으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에 설치할 외벽은 비행기 격납고의 문을 만들 때 보다 훨씬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다. 그는 "작은 바람도 새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며 제작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난관들을 하나둘씩 해결하면서 결국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탄허대종사 기념박물관'에는 이성관씨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곳곳에 녹아 있다. 가령 사찰에 들어가서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을 거쳐 대웅전에 이르는 과정을 108개의 기둥으로 압축해서 드러내는 식이다. 그는 "현대식 건물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접목시키는 건 한국 건축계의 오랜 과제였다"며 이번 작품에서 시도한 새로운 외벽 역시 이런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이상미 기자 ysm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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