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째 총장님의 책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지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입니다. 삼국사기와 더불어 손꼽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 총장님들이 추천한 책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이 책을 추천한 이종욱 서강대학교 총장은 '오래된 미래'를 말했습니다. 고전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원로 역사학자다운 철학이 묻어납니다. 삼국사기에 비해 사료적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학자들은 행간을 읽으며 역사의 빈칸을 채울 수 있고, 일반독자들도 즐겁게 읽으며 다양하게 해석해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 편집자 주 >
[총장님의 책 15편]삼국유사 속의 '오래된 미래'
이종욱 서강대학교 총장이 말하는 책 ‘삼국유사’
동경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처용가다. 삼국유사에 실린 유명한 노래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는 처용의 아내는 왕이 내린 절세미녀였다. 밖에서 놀다 들어온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보고도 노래를 지었다. 더불어 춤을 췄다. 나머지 두 다리가 누구의 것인지 그는 정말 모르는가.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라니. 대책 없는 처용의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장쾌한 영웅의 서사가 없다.
고개를 서양으로 돌려보자.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빼앗긴 아내 헬렌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다. '오디세이아'는 자신이 없을 때 아내 페넬로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악한들을 힘으로 물리치는 영웅 오디세우스를 노래한다. 이런 강렬한 대결의 구도를 생각하면 처용은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다르다. 그는 역사 속에서 승리했다. 처용의 아내를 범했던 역신은 처용의 덕에 감화돼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만 봐도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처용은 신격화된다. 처용무는 조선조까지 전해 내려왔다.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였다. 그는 포용으로 기어이 역신을 물리쳤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에서 요즘 유행하는 '똘레랑스(Tolerance)'나 '관용'이란 말을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역사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 가운데는 얼른 납득가지 않는 것들도 많다. 시대의 맥락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담 없이 자유롭게 읽어내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다.
젊은 대학생이 '똘레랑스'라는 서양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처용을 끌어올 수 있다면 누군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똘레랑스와 처용을 호랑이와 달리 끝없이 인내해서 마침내 사람이 됐다는 우직한 곰의 이야기까지 연결시킬 수 있다면 누군들 감복하지 않을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이제 화두는 다문화사회와 글로벌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덕목이 필수다. 처용과 같은 포용의 자세로 스스로를 가다듬어 볼 수 있다면 이만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없다.
이러한 맥락은 서강이 강조하고 있는 전인교육과도 상통한다. 전혀 다른 문화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글로벌로 표현되는 이 시대 대학에 부여된 핵심과제 중 하나이다. 교육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 창의적 융합교육은 고전 읽기, 인문교육에 그 근본이 있다.
고전은 품이 넓다. 상상의 폭을 키울 여백이 도저하다. 나는 화랑세기를 역주해한 바 있다. 그 책 속의 '미실'이라는 작은 이름 하나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열쇠가 됐다. 고전 속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다. 어떤 것을 읽어내도 좋다. 138편의 기이한 이야기 편편들에 묻힌 사연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의 새로운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
< 서강대학교 총장 이종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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