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고경석 기자]충무로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 강우석이 불과 7개월 전 개봉한 '이끼'와 상반된 영화 '글러브'를 들고 돌아왔다. '이끼'가 시골의 밤을 그린 영화라면 '글러브'는 시골의 낮을 담은 작품이다.
충주성심학교의 청각장애 야구부를 소재로 한 영화 '글러브'는 설 연휴를 앞두고 일찌감치 개봉해 개봉 4일 만에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끼' 개봉 당시만 해도 흥행에 대해 좌불안석이었던 강 감독은 '글러브'의 흥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끼' 때는 영화를 잘 찍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 극중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자극적이어서 찍으면서 지쳐갔던 것 같습니다. '이끼'를 찍으며 다음에는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저 스스로 한풀이하는 의미의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늘 흥행과 평가에 예민해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편해요."
강우석 감독은 데뷔 초에 찍었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언급했다. 몸도 마음도 맑았던 시기에 연출했던 영화를 다시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올해 영화시장을 예측한 것이 아니냐고 묻지만 그는 "관객도 나도 어둡고 잔혹한 영화들에 지쳐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끼'와 달리 '글러브'의 겉모습은 촌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투박하다. 폼 나는 스타일을 추구한 흔적이 전혀 없다. 강우석 감독은 "미장센에 신경 쓰지 않고 드라마만 좇으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퇴물 프로야구 선수 김상남(정재영 분)이 청각장애 야구부 코치를 맡아 1승을 향해 뛰어가는 과정에 집중한 것이다.
'글러브'는 투박하고 진부하지만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강압적인 눈물이 아닌 자연스런 눈물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신파로 흐를 수 있지만 영화는 비교적 담담하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울리고자 마음먹고 찍은 게 아니라서 편하게 연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엉엉 울어라' 한 게 없어요. 영화를 보다 보면 어딘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젖어드는 영화입니다. 제 욕심이라면 관객이 '내가 울고 있구나' 하는 걸 못 느꼈으면 좋겠어요. 저도 콘티 단계부터 울컥했던 적이 많았고 찍으면서도 자주 울컥했거든요."
'글러브'는 '맨발의 꿈' '킹콩을 들다' 등 유사한 스포츠 영화와 비교되곤 한다. 베테랑 감독인 그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강우석 감독이 비슷한 장르의 영화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글러브'의 원천이 KBS 다큐멘터리 '태양을 향해 쏴라'였기 때문이다.
"픽션이었으면 비슷하지 않게 찍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태양을 향해 쏴라'에 근거한 시나리오인 데다 실제 주인공인 아이들이 늘 옆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글러브'에 나오는 감정이 다큐멘터리에 모두 있습니다. 픽션이라면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퇴물 프로야구 투수나 공을 맞고 야구를 그만두는 야구부원 등 가상의 설정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다큐멘터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 야구선수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소재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있었다. '글러브'는 야구부 학생들보다 이들을 지도하는 김상남의 변화에 집중한다. 강우석 감독은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패배자라는 느낌을 준다면 우리 영화는 실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을 잘 못해서 그렇지 충주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의 의욕은 다른 야구부 학생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을 조금 할 수 있는 아이들도 있어요. 조금 더하고 덜하고의 문제지 장애인이 결코 아닙니다. '글러브'는 화면 자체도 밝게 해야 했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느낌으로 찍으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이 생기면 안 된다고, 우리가 용기를 얻는 영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년 넘게 영화를 연출한 베테랑이지만 강우석 감독에게 야구 장면을 찍는 건 쉽지 않았다. 야구부로 출연한 배우들이 대부분 야구 실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걸릴 촬영이 일주일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액션 장면보다 촬영하기 더 힘들었다"며 허허 웃었다.
강우석 감독의 우선 목표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의 흥행실패로 인한 빚을 모두 갚은 것이다. 영화 투자·배급·제작사 시네마서비스가 부활해 다시 충무로 토종자본의 르네상스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회사 설립자 강 감독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그날을 위해 강우석 감독은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차기작으로는 사극을 생각 중이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처럼 왕과 신하가 나오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강우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스포츠투데이 고경석 기자 kave@
스포츠투데이 사진 박성기 기자 music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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