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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탄생 100주년' 人和 한평생

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5>두산그룹 박두병 회장 ④ <끝>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 경제 걱정
올해 기념식 '위대한 기업'발전 계기로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별일 없는가?"

1973년 8월 3일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박두병 회장이 병실을 방문한 김종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한 박두병 회장은 쇠잔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모든 이들의 문병을 거절했는데, 김종대 부회장만은 출입을 허용했다. 눈을 감기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상의 일이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앞서 박두병 회장은 "나 이젠 죽어도 괜찮아. 내가 할 일은 다했어. 하지만 1년만 더 산다면 완전히 마무리를 짓겠는데ㆍㆍㆍ"라는 말로 일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종대 부회장이 문병을 다녀온 다음날 밤 박두병 회장은 눈을 감는다. 향년 63세, 한창 경영활동에 매진할 나이였다. 1962년 두 차례의 췌장수술도 이겨낸 그였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폐암에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1969년 동양맥주(현 OB맥주) 대표이사를 정수창 사장에게 넘긴 박두병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 주한벨기에 명예 영사 등 크고 작은 20여개 단체장을 맡아 공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하며 업계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수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그가 사망한 해인 1973년에는 동양맥주의 기업공개를 단행했으며, 임기가 만료된 대한상의 회장에 재선되기도 했다.


워낙 일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다 보니, 그의 건강을 염려한 박정희 대통령은 "박두병씨가 쉬면 쓰러지니 계속 일하도록 하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공인으로서의 마지막 삶 동안 박두병 회장은 단체장으로서 이권을 챙길 수도 있었지만 회사에 단 1원도 이득을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두산그룹 고위 관계자는 "당시 박두병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해외차관 조달, 신사업 진출 등을 통해 지금의 삼성그룹에 버금갈 만큼 회사를 키울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를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부화뇌동이거나 탐욕의 소치'라고 여기고 사심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는 10월 6일은 박두병 회장이 탄생한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현재 두산그룹은 국내 최고(最古) 기업으로 자산 33조5000억원에 매출 21조4100억원, 29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박두병 회장이 생전에 가장 많이 아꼈고, 마지막 투병 생활중 의사로서 가장 믿고 몸을 맡겼던 4남 박용현 회장이 지난해부터 그룹을 이끌고 있다.


성공한 경영인이었으나 근검절약을 일상생활의 미덕으로 삼았던 박두병 회장의 신념에 따라 두산그룹은 올해 기념식은 조촐히 치룰 예정이다.


겉으로 내세우는 것보다는 박두병 회장의 경영이념이었던 '인화'와 '신용'의 의미를 되새겨 두산이 '존경받는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자리로 마련될 것이라는 게 두산그룹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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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oricm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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