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정민 기자]창업주 DNA서 찾는다 <3> LG그룹 연암 구인회 (2)
'검소.소탈' 생활습관 특유의 회사문화로
단 한번도 법정에 선 적 없는 깨끗한 기업
직원 호칭도 '박兄' 존칭 가족 같은 친근함
$pos="C";$title="";$txt="1962년 4월 독일 푸어마이스터사와 차관계약 체결후 담소를 나누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회장";$size="550,381,0";$no="2010022513403857736_3.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이 싹을 틔운 LG의 경영철학과 기업문화는 체계적인 학문적 연구를 통해 태어난 산물이 아니다. 그가 구인회 상점을 시작으로 사업을 일궈나가며 오랜 기간 쌓아온 경험과 통찰력,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자긍심이 한데 모여 축적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인화 ▲신용 ▲근검절약 ▲정도경영 ▲기술혁신 ▲인재존중 ▲국제화로 압축되는 연암의 경영 철학은 2대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3대 구본무 LG회장으로 계승되면서 변화ㆍ발전해 오늘 날 '글로벌 LG'를 일구는 토대가 되고 있다.
◆'정도경영' 씨앗 뿌린 연암=LG는 2005년 LSㆍGS와의 계열 분리로 자산규모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재계 3,4위를 다투는 대그룹이다. 그러나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구씨 일가에서는 소박함이 묻어난다.
2대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퇴진 후 버섯 농사에 몰두하며 시골에 몸을 묻었고 3대인 구본무 LG 회장의 오랜 취미는 망원경 하나면 그만인 조류 관찰이다. 이처럼 검소함과 소탈함으로 대표되는 LG 특유의 기업문화는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때부터 이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60년대 해외 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 기업체 사장이 해외 출장길에 나서면 회사 임원들이 줄이어 배웅하는 게 관행으로 굳혀져 있었으나 유독 구 회장은 '허례허식'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피했다.
임원들이 "회사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배웅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자, 구 회장은 '바쁜 일 없는 임원에 한해 합승 정류장까지 전송해 달라. 비행장까지는 나오는 것은 안된다'는 회람문을 돌린 일화는 유명하다.
이같은 LG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구본무 LG회장 또한 단촐히 비서만을 대동한 채 서류가방을 들고 출장길에 오르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LG는 근ㆍ현대사를 관통하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른 대그룹 오너 일가들이 검찰청으로, 법원으로 불려다니고 심지어는 영어의 몸이 돼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에 비해 구씨-허씨 일가는 단 한번도 법정에 선 일이 없었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 같은 '정도경영'의 뿌리 또한 연암이 심은 씨앗에서 뻗어나왔다. 연암은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 기업의 내일을 좌우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평생 지켜나갔다.
럭키치약이 치약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하던 시절, 임직원들 사이에서 값을 올려 마진을 높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또 값싼 원료를 써서 이윤을 늘리자고 제안하는 간부도 있었다. 그러나 연암은 "소비자들이 우리 물건을 잘 사 준다고 값을 왕창 올려 받을 건가?"라고 반문하며 "몇 푼 안 남아도 좋으니 영원히 봉사하는 자세로 하다보면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의 머리속에 남게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가 버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국방부로부터 병기창 공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사람을 죽이는 물건은 만들지 않겠다'며 뿌리치기도 했다.
$pos="C";$title="";$txt="1967년 2월 열린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에서 구인회 LG 창업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이 발파를 누르고 있다.";$size="550,381,0";$no="2010022513403857736_2.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글로벌 LG 일군 '인간존중'의 경영철학 =연암이 씨앗을 뿌리고 구자경 명예회장대에서 꽃을 피운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은 지금의 LG를 일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연암은 창업초기부터 형제와 친척 중심의 경영체제를 갖췄음에도 불구, 인재를 구할 때에는 철저히 지연과 학연에서 벗어나 기업을 키울 재목을 찾는데 노력했다.
1956년 럭키화학은 서울대 공과대와 법대에 우수 졸업생 추천을 의뢰, 필기와 면접을 거쳐 3명을 채용했고 다음해 봄에는 공개채용 신문광고를 통해 몰려든 응시자들 중에서 7명으로 선발했다.
연암은 합격자들을 서울과 부산에 분산 배치해 현업부서의 밑바닥부터 일을 익히도록 했다. 사전 전문 지식이 있건 없건 현업부서 일선에서 어려움에 부딪치며 배워야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이같은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연암에 이어 LG그룹을 이끈 구자경 명예회장은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현장을 지키며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고, 구본무 회장 또한 맨 밑바닥부터 하나씩 단계를 밟고 올라와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당시 공채사원으로 입사해 연암과 함께 회사를 일궜던 인재들은 연암이 직원들을 호칭할때에도 항상 '한형, 박형' 하며 존칭을 잊지 않았던 것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연암은 이들을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종업원이 아닌 함께 회사를 일구고 키워나가는 '가족'이라 생각했으며 당시 전무로 일하던 구자경 명예회장에게는 항상 "장남으로서 위치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세계속의 LG' 성장하는데 일조한 국제화의 기틀 또한 60년대 연암이 럭키그룹을 이끌 당시 기초를 닦았다.
연암은 1953년 우리 경제가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시절, 락희산업을 설립해 '우리의 수출입은 우리 손으로'라는 취지로 원자재 수입 업무를 시작해 국제무역업으로 체제 전환을 모색했다. 이어 1956년에는 상호를 반도상사로 바꿔 달고 무역업계를 선도하는 무역회사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65년에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첫 지사를 열었고 일본 동경에는 사무소를 설치했다. 1966년에는 뉴욕지사를 열었고 1968년에는 인도 뉴델리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또 1968년에는 서독에 두개의 지사를 추가로 개설하며 각종 기술 도입에 나서는 등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세계화의 초석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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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jm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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