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소 설립 이야기-③]
$pos="C";$title="롬멜하우스를 나서는 박 대통령";$txt="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소 공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당시 현장사무소였던 '롬멜하우스'를 둘러본 후 나서고 있다.<사진: 포스코>";$size="480,368,0";$no="2009060916275801331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1969년 12월 3일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간 기본협약’이 체결된 후 제철소 부지 조성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바로 눈앞에 닥친 ‘큰 일’은 설비구매였다. 최신설비를 적기에 싼값으로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제철소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그러나 포스코는 건설자금 액수는 제한됐고 제철소 건설과 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전문서적에서 용광로 사진을 본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제철소 프로젝트의 복잡성에 압도돼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포스코는 1969년 12월 15일 일본 기술용역팀(JG, Japan Group)과 예비기술용역계약을, 이듬해 7월에는 본기술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일본 일변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호주의 BHP(Broken Hill Proprietary)과 기술계약을, 한국과학기술원(KIST)과 별도의 기술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엔지코(ENGICO) 등 기자재 검정 전문회사 6개사와 검정용역계약을 체결, 기자재 구입에도 만전을 기했다.
◆5000만달러 쓰러온 팀원 하루 용돈 단 10달러= 이어 최정예 5명의 직원으로 설비구매팀을 만들었다. 구입해야 할 설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본 적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최고의 설비를 구입하기 위해 이들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000만~5000만 달러짜리 설비를 사러 도쿄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에서도 최대한 돈을 아끼기 위해 팀원들의 하루 출장비는 1인당 10달러에 불과했고, 허름한 여관에 묵으며 끼니는 라면으로 때웠다. 저녁이면 속옷과 와이셔츠를 손수 빨아 널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설비를 구입하는 것도 어려운데, 설비 구입 물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설비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보면 볼수록 더 어려웠던 이들에게 JG는 1970년 여름 내내, JG는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설비를 21개군으로 나누고 가격·성능 등에서 조건과 맞는 설비제작사를 복수 추천해 줬다.
설비구매팀은 JG에 작업내용의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 구매협상을 할 때는 제작사들이 담합을 할 수 없도록 두 시간씩 시차를 둬가며 해당 설비제작사과 릴레이 상담을 벌였다. 잡음의 소지를 없애려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
설비구매팀의 총 구매액은 1억7765만여달러. 1970년 6월 오스트리아 푀스트와 후판설비 도입계약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미쓰비시, 미쓰이, 도멘, 이토츠, 마루베니 등과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설비들은 1972년 3월부터 공사일정에 맞춰 포항에 도착하도록 계약이 이뤄졌다.
$pos="C";$title="'종이마패'";$txt="'종이마패'로 불렸던 '설비구매 재량권'";$size="480,368,0";$no="2009060916275801331_2.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정부의 개입·정치인 압력에 시달려= 설비구매단과 JG의 노력과 함께 성공적으로 설비를 구매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이른바 ‘종이마패’였다. 박태준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사인과 함께 받아낸 ‘설비구매 재량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설비구매와 관련해서 원천적인 문제가 있었다. 설비구입 자금은 일부는 대일청구권자금이었고, 일부는 일본 정부가 보증한 상업차관이었다. 청구권자금은 연도별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규정이 적용됐을 뿐 아니라, 자금의 성격상 정부가 계약당사자였다. 상업차관도 사정은 마찬가지. 일일이 정부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의사소통이 잘못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구매업무는 지체되기 일쑤였다. 정치인들이 공급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내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일본 설비공급업체와 협상하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박태준 사장은 구매절차에 대해 전권을 포스코에 넘겨 달라고 수 차례 정부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관료들의 부당한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1970년 2월 3일, 박 사장은 박 대통령을 찾아갔다. 공사현황을 브리핑하는 정례적인 자리에서 평소와 눈치가 다르다고 느낀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을 내보냈다.
박 사장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자, 박 사장은 구매절차와 관련해 포스코가 겪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금 건의한 사항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보라”며 박 대통령은 메모지 한 장을 박 사장에게 건내줬다. 박 사장은 경제장관회의 때 지시자료로 쓰려는가 보다 생각하며 건의사항을 적어나갔다. ▲포스코는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설비공급업체를 정부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선정한다 ▲설비구매와 대금 지불 및 구매계약 등의 절차를 간소화한다 ▲정치헌금과 정부개입을 배제할 수 있게 해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메모를 훑어보더니 왼쪽 윗부분에 서명해서 다시 돌려줬다. 친필서명은 메모 내용과 관련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구매절차는 대폭 간소화됐고, 정치적 압력을 묵살하거나 거절할 수 있게 됐다.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 사이에 “박 사장이 백지 위임장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위임장을 ‘종이마패’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어쨌건 종이마패는 포스코를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일정 부분 지켜주는 데 큰 기여를 했다.<자료 제공: 포스코>
정리=채명석 기자 oricm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