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경영자(CEO)는 '리 아이아코카'란 사람이었습니다. 40대에 포드자동차 사장까지 승진, 포드의 황금시대를 연 아이아코카는 1979년 파산 직전의 크라이슬러 회장으로 취임,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킵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 회생을 위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10억달러를 정부로부터 지원 받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 회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습니다.
취임 첫해부터 관리 체제를 전면 재정비하고 엄격한 자금 관리를 제도화하고 품질 관리 기준을 높이고 대량해고를 단행해 지출을 줄였습니다. 크라이슬러는 눈부신 성과를 냈고, 아이아코카는 산업사상 가장 유명한 CEO 중의 한명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인터넷이 없던 시절, 태평양 건너 한국의 중학생이 그의 명성을 전해 들을 정도였으니 상당히 유명하긴 했나봅니다.)
이 인기 덕에 그는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기에 너무 도취됐던 것일까요. 아이아코카는 재임 중반부터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수리에 앞장서고 의회의 예산삭감위원회에 들어갔으며 두번째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빴던 것은 무리한 사업다각화였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제조업체인 마세라티와 합작투자를 단행해 2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힌 것입니다. 이에 대해 크라이슬러의 전직 임원은 아이아코카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개인적 애정이 사업의 현실성을 무시한 채 밀어붙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때부터 크라이슬러는 다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 것일까요. 아이아코카가 사랑(?)했던 이탈리아인들이 크라이슬러를 인수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4일 외신에 따르면 파산보호 신청을 한 크라이슬러를 '페라리'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아트그룹이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피아트는 GM의 유럽법인인 오펠도 함께 인수해 크라이슬러와 합쳐 새로운 법인을 만들 계획입니다.
◆ 호기맞은 자동차 완성업체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GM도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국내의 현대차그룹은 미국시장에서 강세를 이어갔습니다. 4월 미국시장 판매는 현대차가 3만4000대(전년동기대비 -13.6%, 시장점유율 4.1%), 기아차 2만6000대(-14.8%, 3.1%)로 시장대비 선전했습니다. 4월 미국의 자동차 판매대수는 총 81만9817대로 지난해 4월보다 34.3% 감소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의 선전은 '제네시스'와 '쏘울'의 성공적인 신차효과 덕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라이슬러의 파산보호 신청은 현대차가 미국시장에서 한단계 도약하는데 기회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증권은 크라이슬러의 파산을 '회생형'보다 '해체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합니다. 피아트와 전략적 제휴 성공여부(피아트는 자본투입없이 기술공여, 경영자문, 유통망 공유 등을 통해 지분을 인수하므로 리스크가 크지 않을 것)나 소규모 채권단과 복잡한 이해관계 해소를 통한 신속한 파산절차 완료 등이 모두 불확실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성공적 절차를 밟더라도 이미 추락한 브랜드 신뢰도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현대차를 비롯한 다른 자동차업체들에게는 장기적인 기회요인이란 얘기입니다. 특히 브랜드 인지도 개선을 통한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기반 확보에 나서고 있는 현대차그룹 입장에선 선진메이커와 브랜드 격차를 축소할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합니다. 실제 현대차는 이 기회를 활용해 미국시장 점유율을 5%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의 파산으로 미국시장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올해 1분기 미국 시장의 산업수요는 지난해 동기에 비해 38.4%나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더구나 크라이슬러 사태가 GM까지 이어질 경우, 미국의 소비와 생산이 더욱 위축돼 마냥 시장점유율 상승만을 즐길 수 없는 상황이란 우려입니다.
◆ 후폭풍 우려 부품업체, 그러나...
경쟁자인 완성차업체들은 남몰래 미소 지을 일이지만 크라이슬러의 파산보호 신청에 타격을 받을 업체들도 적지 않습니다. 크라이슬러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그 주인공들입다. 크라이슬러는 파산보호 신청을 하며 바로 생산시설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크라이슬러에 납품하는 부품 생산도 자연스럽게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코트라(KOTRA) 디트로이트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가 한국 자동차부품업체들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총 48개 업체 가운데 48%(23개 업체)가 크라이슬러에 직간접적으로 부품을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들 업체들이 크라이슬러에 연간 납품하는 규모는 7억3000만달러에 이릅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크라이슬러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1위 업체 GM까지 무너진다면 미국에 수출하는 대부분 국내 부품업체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국내의 GM계열사인 GM대우까지 고려한다면 미국의 자동차산업 위기에 따른 여파는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 대부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반면, 이번 사태가 분명 위기지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크라이슬러가 피아트 중심의 새로운 회사로 거듭난다면 생산 라인업이 기존의 대형 SUV와 픽업트럭에서 소형차 중심으로 전환돼 소형차 부품 생산 기술력과 노하우를 보유한 한국 기업에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크라이슬러나 GM쪽 납품이 없거나 낮은 업체들도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코스피의 현대모비스, 세종공업, 코스닥의 성우하이텍, 평화정공 등 현대차 납품비중이 높은 업체들은 최근 신고가를 기록하는 등 벌써부터 증시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전필수 기자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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