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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골 편지]겨울의 방문자들

지난 주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대학 일년 후배다. 한 때 그와 나는 함께 공부했고, 함께 세상을 고뇌한 적이 있어 항상 그리웠던 녀석이다.

어떻게 살았을까. 그의 방문 소식을 들은 것은 원적산 중턱에서였다. 모처럼 봄볕 따스한 늦겨울을 즐길 참이었는데...이런 겨울녁에 햇살을 누리는 호사로움을 미룰 만한 후배다.

등산길을 뛰다시피 뒤돌아와 십수년만에 그와 조우했다. 반가웠다. 우리는 모처럼 마당에 숯을 피우고 삼겹살을 구워 점심을 나눴다. 아마도 그가 아니더라도 반가웠을 것이다.

전원생활자들에게 가장 힘든 시간은 겨울이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난방비가 가장 먼저 올라간다. 우리는 심야전기를 난방으로 활용하고는 있는데도 한달에 30여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커가는 아이들에 맞춰 옷가지 몇개 더 장만하는 것도 필수다. 겨울을 나는 비용은 무시하기 어렵다.

적막함도 힘들게 하는 것중의 하나다. 그래서인가.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선비의 고고한 정신이 아니라 지독한 외로움으로 해석한다. 정착을 시작했던 첫해가 생각난다.

잣나무골에 첫 발을 내딪던 첫해는 눈이 참 많이 내렸다. 한번 내리면 발목을 잠길 정도였다. 숲으로 오르는 길은 아예 빙판이 돼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퇴근 무렵 차를 마을 회관앞에 두고, 눈보라속을 헤치며 숲으로 오른 날도 많았다. 봄이 오고서 포크레인을 동원하고서야 빙판길이 열렸다.  

우리는 눈속에 갇혀 세한(歲寒)을 견디느라 애를 먹었다. 네 식구가 외로움을 치루며 곤혹스러워하는 동안 눈길을 헤치고 내려온 짐승들의 발자욱조차 작은 위안거리였다. 집 주변을 맴돌다 갔을 토끼며, 고라니며 작은 짐승들의 자취가 그렇게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나는 텃밭에서 콩 한말, 고구마 댓 박스, 호박 삼십여 통, 고추 열 댓근 정도를 수확했었다. 그것은 나중에 두고두고 산짐승 먹이로 집 주변에 뿌려졌다. 사실 그들은 안절부절하는 우리에게 유일한 벗이었다.그러니 곡식 몇 줌으로 대접이랄껀 없다. 
주변에 먹이를 뿌리자 제일 먼저 쥐들이 찾아왔다. 배고픈 쥐들은 집 안에까지 침범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생선 뼈, 고깃덩이를 던져 들고양이들을 불러들였다. 쥐들을 소탕하기 위해 간사한 꾀를 부린 셈이다.

당연히 효과 만점여서 나는 내 잔꾀에 스스로 실소를 짓기도 했다. 들쥐와의 전쟁.명목은 쥐들로부터 연약한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것. 혹시 모르지 않는가. 유행성 출혈열이라도 감염될 지도...나는 그렇게 고양이들을 불러다 마침내 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가 오기전에는 아마도 쥐들이 이곳의 주인이었으리라. 오히려 침입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꼴에 화가 무척 많이 났으리라. 사실 쥐도 겨울의 방문자들이다. 물론 달갑지 않은 것을 빼고는 손님으로서 대접을 받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은 집문서 하나로 주인이라고 하는 내가 가소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쥐들에게 나는 침입자다. 나는 사실 그들과의 수난을 즐겼다. 외롭고 답답하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겨울나기는 쉽지 않다. 찾아오는 친구들도 없으니 더욱 그렇다.

나는 전원생활을 얘기하고, 후배는 아파트 생활을 얘기하고, 아내들과 아이들은 그 얘기를 듣는다. 사소한 일상사지만 즐겁다.모처럼 여유로운 오후였다.


이제 또 무엇이 찾아오고 또 무엇과 다투려나 ? 쥐들과의 화해는 언제쯤 이뤄질까 ? 내가 머무는 잣나무골의 전원주택은 다른 사람들의 주거와 무엇이 다른가 ? 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여전히 내 주거는 질문투성이다.

찾아온 이들이 제일 먼저 묻는 말은 "몇 평이니 ? 집값은 많이 올랐니 ? 애들 학교는 ?"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고 의문이 충족되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나도 그렇다. 왜 사람들은 여기 생활이 얼만큼 즐거운가하는 질문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당히 잘 들러댄다. 타협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받아들인다. 겨울의 방문자들은 언제나 나를 뜨겁게 한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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