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사가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 창업자를 이해관계인으로 설정하고 회생 등 절차가 개시될 경우 주식 매수를 청구할 수 있다는 계약을 체결했다면, 창업자가 직접 주식 매수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벤처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창업자들의 투자 유치에 위축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6부(재판장 김형철 부장판사)는 7월16일 벤처투자사 A사가 피투자사 대표이사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주식매수청구권 이행 약정금 지급 소송(2024가합59259)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연합뉴스.
A사는 2017년, B씨가 대표이사로 있던 스타트업 C사에 상환전환우선주(RCPS) 형태로 5억원을 투자했다. 당시 B씨는 C사의 최대 주주이자 대표이사로, 계약의 당사자가 됐다. 계약서에는 회생, 청산, 파산 등 절차가 개시될 경우, A사가 보유한 C사의 지분 전부 또는 일부를 B씨가 매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2023년 12월 C사는 경영난으로 서울회생법원에 간이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법원은 2024년 1월 회생 개시 결정을 내려졌다. A사는 계약에 따라 B씨에게 5억원에 연복리 15%를 적용한 약 12억원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B씨는 "C사나 B씨의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는 상황임에도 회생 개시라는 사정만으로 창업자인 이해관계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민법 제103조(선량한 풍속 위반) 및 제104조(불공정한 법률행위)에 따라 무효"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B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B씨는 C사의 대표이사로서 이 사건 계약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이해관계인으로 계약에 날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해당 계약에 관해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에게 일정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나 선량한 풍속에 위반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B씨가 궁박, 경솔, 무경험 상태에서 계약했거나 A 사가 이를 악용했다는 자료도 없다"며 "당사자 간의 의사 합치에 따른 법률 행위의 구속력을 무효로 할 수 있는 반사회성을 띠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법조와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소송 제기와 판결"이라는 반응과 함께 "다소 무리한 투자금 회수"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주현 법무법인 슈가스퀘어 변호사(41·변호사 시험 7회)는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창업자들의 투자 유치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며 "향후 입법을 통해 경영난에 빠진 회사 대표자 개인에 대해 무과실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고려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지 법무법인 별 변호사(43·변시 3회)는 "이 사건 투자 계약이 체결된 2017년에는 창업자에게 포괄적인 연대보증을 요구하거나 계약에 주식매수청구권 조항을 넣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며 "사실상 상법상 주식회사의 유한책임원칙 취지에 반하는 투자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벤처 투자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위험이 동반되는 데도 불구하고 투자자는 손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며 "이후 벤처투자법상 연대보증을 제한하는 규정이 추가됐고, 현재 벤처투자협회 표준계약서를 통해 연대보증 및 주식매수청구권에 대해 자제하는 분위기를 고려하면 오히려 스타트업 및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표준투자계약서에 대한 상호 논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스타트업 회사 대표는 "이 사건의 계약은 대표이사를 이해관계인으로 설정해 투자사에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투자사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게 될 때 사실상 투자사가 과도하게 연대 보증을 요구하는 셈인데 이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와 너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벤처 창업자가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할 수 있게 하려면 입법 또는 회생법원의 재량을 통해 여지를 만들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벤처캐피털(VC) 업계 관계자도 "앞으로 창업자 입장에서는 유사한 조항을 근거로 투자를 받지 않거나 VC 입장에서는 그 조항이 없다면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양측 입장을 생각해도 벤처투자 시장이 다소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수현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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