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순기자
백화점 바이어가 해녀에 푹 빠졌다. 신세계백화점 신선식품팀에서 수산물바이어로 일하는 강영남 과장(34). 그는 최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제주 해녀들의 역사와 문화,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숭고한 희생정신에 매료됐다"면서 "이들이 채집하는 해산물이 보다 많이 유통될 수 있도록 연계 상품을 개발하고, 풍성한 스토리를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며 웃었다.
강영남 신세계백화점 수산물바이어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해녀의 신세계' 브랜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 과장이 아이디어를 내 브랜드로 탄생한 아이템이 신세계백화점의 자체브랜드(PB) '해녀의 신세계'다. 제주 해녀들이 당일 채취한 해산물을 주요 매장으로 공수해 판매하거나 원물을 활용한 간편식 조리식품을 선보이는 코너다. 지난 2월27일 브랜드를 정식 론칭하고 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과 사우스시티, 타임스퀘어점, 푸드마켓 도곡 등 대도시 상권에 있는 4개 점포에 이를 도입했다. 본점과 센텀시티, 대구신세계, 광주신세계에서는 원물만 판매한다.
그는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대부분 제주도 내 식당과 외식업체 등에 유통한다"며 "제주를 찾는 관광객 수가 줄어 판로 확보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육지에서 이를 유통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브랜드화했다"고 말했다.
강 과장은 2019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해녀들의 애환을 듣고 제주 해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해녀들의 소득 증대에 일조하고, 백화점 차원에서 사회공헌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후 2023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식품관 내 슈퍼마켓 '신세계 마켓' 리뉴얼(개보수)을 준비할 당시, 제주산 해산물을 당일 공수해 판매하는 코너를 운영해 보겠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A4 용지 50장 분량의 기획안을 제출해 허락을 받았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신세계 마켓'에 '해녀의 신세계' 조리식품이 진열돼 있다.
네트워크나 관련 업무 경험이 전혀 없던 강 과장은 맨땅에 헤딩으로 도움을 줄 이들을 수소문했다. 수산물 거래처인 제주 수산업협동조합 관계자를 통해 도내 자연산 수산물 유통과 직접 판매를 담당하는 '만제영어조합법인'의 김수정 대표를 소개받아 사업을 구체화했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강 과장이) 의욕만 가지고 제안하는 줄 알고, '얼마 못 가 포기하겠지'라는 생각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며 "여러 차례 제주도를 방문하고 끈기 있게 추진하는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부터 해녀들이 채취한 보말과 성게, 미역, 톳, 뿔소라, 오분자기 등 제철 해산물을 매장에 들여와 판매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들 해산물 상당수가 육지 소비자들에게 익숙지 않은데다, 조리 방법도 낯설어 외면받았다. 강 과장은 신세계 마켓 입점사인 한식 전문 '시화당'의 요리연구가 김재희 대표와 일식 브랜드 스시도쿠겐의 류시주 헤드셰프 등 전문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물을 활용한 조리식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각각 25년과 34년 경력의 베테랑 전문가들이 이에 화답해 한식과 일식 메뉴 30~40종을 개발해냈다.
강 과장은 "날씨나 생태계 보전을 위한 기간 때문에 해녀들이 물질할 수 있는 일수가 연중 90일도 되지 않는다"면서 "원물 수급이나 보관 등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소비자들이 간편하고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해야 브랜드를 존속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신세계 마켓이 문을 연 뒤 약 4개월간 해녀의 신세계 코너 매출은 8개점 합산으로 316% 신장했다. 당초 목표치의 143%를 달성해 가능성을 확인했다. 원활한 원물 수급을 위해 거제와 여수 등 다른 지역 해녀들이 채집한 해산물도 들여올 계획이다.
강영남 신세계백화점 수산물바이어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해녀의 신세계' 브랜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 과장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폭싹 속았수다 등 K콘텐츠로 소개된 해녀들이 관심을 받으면서 해외에서 요청하는 해녀 관련 강연과 상품 홍보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달 16일에는 프랑스 파리 시테대학교에서 열린 K플러스 페스티벌에서 해녀의 유래와 역사 등을 소개하는 강연 자료를 직접 만들어 총괄기획자로 동행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도 강연과 팝업스토어 운영 등의 제안을 받아 올해 하반기 참가 여부를 검토 중이다.
그는 "아직은 백화점에서 수급하는 원물의 양이 많지 않아서 해녀들의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며 "그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소비자의 관심을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