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형기자
자일리톨, 노키아의 나라 핀란드는 사실 유럽의 '퀀텀(양자) 강소국'입니다. 양자 컴퓨터 관련 기초 과학 기반이 탄탄하고, 그 위에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했지요. 하지만 핀란드가 기초 과학 하나만으로 경제 강국 못지않은 양자 생태계를 만든 건 아닙니다. 21세기 초부터 성장해 온 '양자 소부장' 강소 기업들과 핀란드만의 독특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 그 뒤에 있습니다.
핀란드 최초의 상용 양자컴퓨터 개발업체인 IQM의 컴퓨터. IQM 제공
지난 3일 '서울-핀란드 퀀텀 이노베이션 포럼'에선 핀란드 양자 생태계의 과거와 현황이 상세히 소개됐습니다. 핀란드는 일찍이 세계적 통신 기업 노키아 산하 벨연구소에서 양자 관련 연구를 진행한 양자 선도국으로, 핀란드 정부도 양자 기술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2023년부터 올해까지 2800만유로의 연구개발(R&D)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인구 550만명의 핀란드에선 막대한 투자금이지만, 사실 양자 컴퓨터 우위를 두고 경쟁을 펼치고 있는 열강들과 비교하면 약소합니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양자컴퓨터 기업들의 가치는 이미 수조원대에 달하고, 중국은 올해부터 5년간 150억달러를 쏟아붓기로 했으니까요. 이런 한계에도 핀란드는 양자 컴퓨터 분야에서 분명히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올해 3월 유럽 최초 50큐비트(Cubit) 양자 컴퓨터 개발에 성공했고, 앞으로 2년 안에 150~300큐비트로 확장한다는 로드맵도 확정했습니다.
블루포스의 극저온 냉동기. 블루포스 홈페이지
핀란드가 협소한 인력과 재원으로도 앞서나갈 수 있는 배경엔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소부장처럼 양자 컴퓨터에도 현재 소부장 공급망이 형성되고 있는데, 핀란드는 그중에서도 극저온 냉동 기술에 특화됐습니다. 포럼에 참석한 유리 예르비아호 주한 핀란드 대사가 직접 "우리는 저온 기술에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자해 왔다"며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였지요.
극저온 냉동기는 양자 컴퓨터의 한 종류인 '초전도 양자 컴퓨터' 구동의 핵심 부품입니다. 초전도 양자 컴퓨터는 극도로 불안정한 양자 컴퓨터를 초전도체로 안정화하는 게 핵심인데, 초전도체는 보통 -200도 안팎의 극저온 환경에서만 '상전이' 현상을 일으켜 초전도 성질을 발동합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본사를 둔 '블루포스(Blufors)'가 현재 양자 컴퓨터 관련 극저온 냉동기 업계 1위입니다. 2008년 창업한 이 회사는 이제 매출 1억9000만유로에 달하며, 전 세계 양자 컴퓨터의 약 95%에 냉동기를 납품합니다. 한국에만 24개의 블루포스 냉동기가 설치됐다고 합니다.
핀란드의 정부 출연 연구 기관 'VTT'는 양자 컴퓨터 생태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다. 임주형 skepped@
양자 공급망에 블루포스가 있다면, 양자 생태계엔 핀란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VTT'가 있습니다. 북유럽 최대의 연구 기관이자, 핀란드의 응용 전자 공학을 책임지는 기관입니다. VTT의 독특한 강점은 기초 연구와 상업화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보통 기술 산업에는 기술 성숙도(Technology Readiness Level·TRL)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TRL은 1부터 9까지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1~3은 성숙도가 매우 낮은 초기 연구 단계, 7~9는 상업화 직전 단계로 고려됩니다. VTT는 그 중간 단계인 4~6 과정을 보조합니다.
VTT의 접근 방식은 새로운 산업의 생태계를 조성할 때 유리합니다. 대학이나 연구소가 맡기엔 너무 성숙했고, 기업이 맡기엔 너무 위험한 단계의 기술 개발에 참여해 스타트업의 제품 런칭 과정을 돕는 겁니다. 심지어 VTT는 정부 기관임에도 직접 스타트업도 창업하기도 합니다. VTT의 양자 스핀오프(spinoff·기업이나 대학에서 파생된 스타트업)인 '악틱 인스트루먼츠'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악틱 인스트루먼츠의 AI-투파-C(AI-TWPA-C) 증폭기. 양자 컴퓨터 큐비트의 미약한 신호를 증폭하는 핵심 부품이다. 악틱 인스트루먼츠 제공
악틱 인스트루먼츠는 초전도 양자 컴퓨터의 안정화에 필수적인 증폭기를 개발합니다. ‘AI-투파-C(AI-TWPA-C)’라는 이름의 해당 제품은 원래는 VTT의 학자들이 2018년부터 연구해 왔습니다. 악틱 인스트루먼츠 사업 개발 수장인 빌게 일드즈 박사는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VTT는 이전부터 연구 중이던 제품이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르면 기업을 만들어왔다"며 "이런 상업화 전략도 우리의 미션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양자 컴퓨터 '생산라인'을 갖춘 스케일업 기업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또 다른 초전도 양자 컴퓨터 업체 'IQM'은 누적 2억유로의 투자금을 유치한 회사인데, 이미 본사에 연간 20대의 완전한 양자 컴퓨터를 양산 가능한 공장을 구축했습니다. 이 회사의 50 큐비트 양자 컴퓨터는 곧 충북대에도 설치될 예정입니다.
핀란드 양자 컴퓨터 생태계의 특징 중 하나는 초전도 양자 컴퓨터 개발에 특화됐다는 겁니다. 이는 극저온 기술을 선도한다는 점, 양자 생태계 리더십을 갖춘 VTT가 초전도 양자 기술에 일찍이 투자해 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다만 양자 컴퓨터를 개발하는 각국의 기업, 기관들이 늘어나면서 이젠 초전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양자 컴퓨터들이 경쟁 중입니다. 일례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아이온큐, 영국-미국 합작 업체인 퀀티넘 등 영미계 스타트업들은 전자기장이나 레이저로 이온 입자를 가둬 큐비트를 형성하는 이온 트랩 방식을 연구 중인데, 둘 다 각각 핀란드의 연간 양자 R&D를 상회하는 재원을 투자합니다.
이에 대해 일드즈 박사는 "현재 글로벌 양자 산업의 벤처 자금 중 50%는 초전도 방식에, 나머지 50%는 다른 형태의 양자 컴퓨터에 투자된다"며 "이 사실 만으로도 (초전도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드즈 박사에 따르면 모든 양자 컴퓨터에는 저마다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특히 이온 트랩은 양자 정보 처리에 용이한 '양자 결맞음' 상태를 유지하기 쉬워 최근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어디까지나 양자 컴퓨터 시스템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일드즈 박사는 "큐비트 숫자, 확장성 등 양자 컴퓨터의 최종 완성을 위해 고려해야 하는 변수들은 정말 많다"며 "큰 그림을 보면 아직 초전도 방식의 진척도가 더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일드즈 박사는 어떤 기술이 양자 우위를 달성하는지에 대해선 개의치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이든 양자 컴퓨터 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환영한다"라며 "단지 우리의 전문성이 초전도 양자 컴퓨터에 맞춰져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