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희기자
공사 현장 내 레미콘 생산시설인 '배치플랜트(batch plant)' 설치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던 정부가 일단 한걸음 물러나 접점을 찾기로 했다. 그동안은 현장 배치플랜트의 설치·생산이 제한된 기준에서만 이뤄져 인근 레미콘 업체에 사업 기회가 있었는데, 이 제한을 완화키로 했다가 레미콘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논의를 더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규제 완화가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울 시내의 한 레미콘 공장에서 레미콘 차량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2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최근 현장 배치플랜트 설치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건설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 개정안'을 행정 예고하고 기관·단체 등을 대상으로 의견 수렴을 진행했다. 이는 지난해 12월23일 정부가 발표한 '건설산업 활력 제고 방안'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다만, 국토부는 레미콘 및 운송업계의 목소리를 수용해 개정안의 추진을 보류하는 쪽으로 최근 방향을 바꿔 잡았다. 국토부 관계자는 "업계의 우려가 워낙 크다 보니 업계 의견을 좀 더 수렴하고 접점을 찾으면서 가다듬자는 의미"라며 "업계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선 정확히 설명하고 좀 더 시간을 가지며 간극을 해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장 배치플랜트란 시공사가 건설공사 현장에서 시멘트, 모래, 자갈 등을 조합해 레미콘을 직접 생산,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설비를 말한다. 해당 설비를 이용하면 레미콘 제조사로부터 레미콘을 조달받지 않아도 돼 공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토부의 이 같은 방안이 공개되자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 등 레미콘 업계는 일제히 강력하게 반발했다. 국토부의 이번 개정안이 전국 중소 레미콘 업체들을 고사시키는 조처라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규제 완화로 많은 건설 현장에 배치플랜트가 설치되면 인근 레미콘 업체들의 제품을 굳이 사용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레미콘 업계의 일감은 줄게 될 것"이라며 "국토부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더 강력한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했다.
국토부가 행정 예고한 개정안의 핵심은 '90분 이내 건설 공사 현장에 공급이 불가능한 도서·벽지 지역 및 교통체증 지역'으로 제한했던 현장 배치플랜트 설치 기준을 '90분 이내 건설 공사 현장 공급이 불가능한 모든 경우'로 확대하는 내용이다. 현장 배치플랜트로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을 소요량의 50% 이하로 제한하던 기준을 삭제해 현장 배치플랜트에서 레미콘 전량을 생산·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장 배치플랜트에서 생산된 레미콘을 인근 건설 공사 현장까지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전문가들은 건설 현장의 납품 차질을 해소하면서도 업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레미콘 생산 방식의 다양화'를 제시한다. 올해 말 삼표 풍납 공장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서울에 남은 레미콘 공장은 두 곳으로 줄게 됐다. 이에 서울 반포·한남·장위동 일대에 예정된 공사 현장에 레미콘 조달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박상헌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 등 해외에서는 레미콘 공장이 아닌 건설 현장에서 물을 직접 배합하는 '건식 레미콘'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생산 방식을 이용하면 '90분 이내 현장 도착' 조건으로 인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며 "그간 국내에서는 습식 레미콘 외의 다른 생산 방식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는데, 이제는 다양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