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진기자
올해 글로벌 채권 펀드에 900조원 가까운 자금이 순유입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들이 통화 완화 사이클에 진입하자 투자자들이 앞다퉈 채권을 사들인 결과다.
다만 내년에도 채권이 올해와 같은 흥행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에 이미 글로벌 자금은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인 미국 증시로 발 빠르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
17일(현지시간) 금융 데이터 제공업체 EPFR 집계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중순까지 선진국 및 신흥국 채권 펀드에 총 6170억달러(약 887조원)가 순유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직전 사상 최고치인 2021년의 5000억달러를 한참 뛰어넘는 수준이다.
올해는 인플레이션이 안정된 상당수 국가에서 연이어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면서 ‘세계 피벗(pivot·정책 전환)의 해’라고 불렸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도 발 빠르게 채권을 매수했다는 분석이다. 통상 금리 인하기에는 채권 투자 수익률이 상승한다. 채권은 고정된 이자에 더해 가격이 표시되는 금융 상품인데, 금리 인하로 종래에 발행된 높은 금리의 채권 수요가 커지면서 채권 가격 상승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올해 채권 투자 붐의 주 요인으로 꼽힌다.
구체적으로는 국채 가격 등 ‘기초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상장지수펀드(ETF)에 3500억달러가 유입되며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역시 역대 최대 자금 유입이다. 모닝스타 다이렉트에 따르면 올해 지난 10월까지 블랙록과 뱅가드의 채권 펀드에 각각 1110억달러, 1200억달러의 자금이 들어왔다.
특히 국채보다는 기업채 수요가 더 높았다. ICE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기업채권지수의 채권 금리는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미 국채를 비롯한 무위험 국채 대비 최저를 기록했다. 이는 그만큼 투자자들이 기업 차입비용 감소, 강력한 실적 기대감 등에 힘입어 기업채를 사들였다는 뜻이다. HSBC의 윌럼 셀즈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는 “몇 년 전 금리가 오르기 전에는 많은 기업이 장기간 자금을 묶어둬야만 했다”고 말했다.
다만 내년에도 채권이 흥행을 이어갈지는 미지수다. 다음 달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예고하면서 이미 증시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는 흐름이 포착되고 있는 탓이다.
TD 시큐리티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대선 이후 4주간 1170억달러가 미국 주식 펀드로 흘러갔다. 이는 같은 기간 전 세계 채권으로 유입된 자금(270억달러)보다 4배 이상 많은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에 대규모 관세 등 트럼프 당선인의 경제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재점화시킨다면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에도 제동이 걸리며 채권 시장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이 미 경제학자 4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대다수가 내년 말 미국 기준금리가 3.5% 이상일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9월 조사에서는 대부분이 3.5%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는데, 이른바 ‘트럼프 리스크’가 추가되며 Fed가 금리를 많이 내리지 못할 것으로 전망을 선회한 것이다.
한편 대기성 자금인 미국 머니마켓펀드(MMF) 잔고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미 자산운용협회(ICI) 집계에 따르면 MMF 자산 규모는 지난 10월 6조4700억달러로 집계됐다. 올 들어 유입된 자금만 5조달러가 넘는다. MMF는 단기자금을 운용하는 데 주로 쓰이는 펀드로 단기채권을 비롯해 여러 금융상품에 투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