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고수열전]⑥신진화스너공업 김정호 공장장…빗자루부터 든 '볼트 명장'

25세 입사, 35년째 신진화스너공업서 '볼트 제조' 한길
"가만 있는데 기술 가르쳐주겠나" 충고에 정신 번쩍…야간 공장서 남몰래 연습
"최고 기술자는 멀티 플레이어, 업무 연관된 모든 것 할 수 있어야"

"불평하더라도 일을 할 땐 제대로 해라."

볼트 제조업계의 최고수(最高手) 김정호 신진화스너공업 공장장은 "어떤 일이든 자신이 선택한 일이다. 자신이 선택한 만큼 자신을 믿고 일하라. 일이 힘들면 불평을 해도 괜찮지만, 불평만 하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삶이 힘들어진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정호 신진화스너공업(주) 공장장이 세계 최초로 개발된 450㎜ 볼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종화 기자]

신진화스너공업은 특수 볼트 분야의 세계적인 강소 기업이다. 정밀기계장비, 초대형 선박, 원자력발전설비 등에 사용하는 볼트는 하나 가격이 수백만~1억원 이상이다. 김 공장장은 1989년 11월 스물다섯에 이 회사의 전신인 신진볼트에 입사했다. 신진볼트는 2010년 판매 자회사인 신진화스너와 합병, 신진화스너공업으로 새로 출발했다. 다음 달이면 이 회사에 근무한 지 만 35년째다. 김 공장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트 제조 기술자다.

이런 고급기술자가 35년째 한 회사, 특히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경우는 드물다. 뛰어난 기술자로 업계에 알려진 만큼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이 회사에서 월급 70만원을 받을 때 일본의 유명 기업에서 지금 받는 월급의 7배가 넘는 월 500만원을 주겠다면서 스카우트를 제의했으나, 그는 이 회사에 남았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람들과 만나면 "사장님과 형제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실제로 무슨 관계냐고 물었더니 "형제보다 더한 관계"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만있는데 누가 기술 가르쳐 주겠나?"

전북 고창 출신인 그는 인문계인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군을 제대하고 직장을 찾는 그에게 친형이 "헷다·포머 기술이 비전이 있으니 한 번 배워보라"는 권유에 따라 당시 신진볼트에서 일하던 형 친구 덕분에 신진볼트에 입사했다. 헷다·포머는 볼트와 너트 제조공정과 장비 등을 일컫는 단어다. 동향의 형 친구 '백'으로 입사는 했지만, 기술이 없는 그를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으나, 입사 후에 한 달 내내 빗자루질만 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만둬야 하나' 싶을 때 형의 친구가 "그냥 기술을 가르쳐주진 않을 거다. 1년 넘게 잡일을 하며 기다려도 가르쳐줄까 말까 한 데 가만히 있는 너에게 누가 기술을 가르쳐주겠냐"면서 "기다리지 말고 기술을 가진 사람이 가르칠 마음이 들도록 네가 뭔가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스물다섯. 신진화스너공업(주)에 막 입사한 김정호 공장장이 혼자 계룡산에 올라 찍은 사진. [사진=김정호 개인 소장]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업무를 마치면 저녁만 먹고 기숙사에 들르지도 않고 다시 공장으로 왔다. 심야에 공장 경비에게 부탁해서 불을 켜고 낮에 본 선배들이 기계 다루던 것을 따라 하며 연습했다.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온 비싼 설비와 장비를 수없이 분해하고 재조립하면서 몇 달간 잠을 거의 자지 않으면서 기술을 익혔다.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가 새 기계가 공장에 들어왔는데 다룰 사람이 없었다. 기술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서서 기계를 돌리니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기술을 가르친 적도 없는데 혼자 새 기계를 여유롭게 다루니 모두가 놀란 것이다.

"더 좋은 데 가겠다" 사표 냈지만….

그 후 3개월이 지나고 그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이 회사에서는 더 배울 것도 없는 만큼 더 좋은 회사로 옮기겠다는 이유였다. 당시에는 그렇게 더 나은 회사로 옮겨가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었고, 선배나 다른 직원들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정한성 신진화스너공업 대표는 "월급을 올려줄 테니 여기서 계속 일하라"면서 간곡하게 그를 붙잡았다.

한 달 뒤 일당 6500원을 받던 그에게 정 대표는 일당을 두 배 가까운 1만1500원으로 올려줬고, 월급에 별도로 기술수당 5만원을 더한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대우해줬다. 젊은 날의 자만이었지만,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 그는 "월급이 올랐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장님이 자신을 능력 있는 기술자로 인정해주고 있다는 점이 기뻤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 회사의 에이스가 됐다. 정 대표의 권유로 컴퓨터를 배우면서, 캐드도 함께 익혔다. 다른 회사에 견학을 보내 기술을 습득할 기회도 마련해줬다. 밤 9시에 야근이 끝나면 공장에 남아 추가로 1시간씩 선배들에게 기술을 배웠다. 선반과 밀링머신 등 공고 출신들이 다루던 주요 기계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그렇게 5년을 했더니 모든 기술을 보기만 해도 익힐 수 있었고, 고쳐야 할 점이 저절로 보였으며, 다른 사람도 가르칠 수 있게 됐다. 금형설계·공정설계·파스포머 냉간·열간 단조 등 못 하는 게 없는 일 잘하는 기술자가 됐고, 배필을 만나 결혼도 했으며, 자녀도 생겼다.

공장의 자동화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는 김정호 공장장. [사진=김종화 기자]

사경 헤매는 아들, 병원비 몰래 내준 사장님

그러다 위기가 닥쳤다. 1996년 12월 태어난 둘째가 3일 만에 갑자기 패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의사는 방법이 없다면서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던 그는 "무엇이든 해보자"면서 병원에 매달렸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고 산소호흡기로 호흡하던 둘째가 일주일 만에 자력 호흡을 시작했고, 2주 만에 기사회생해 출생신고까지 했다.

둘째인 아들은 살렸지만, 회사 일은 보름 동안 손을 대지 못해 엉망이 됐다. 당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이었으나 아들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병원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그를 당시 공장장이 찾아와 "회사로 나와 일을 좀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사직서를 내밀며 "퇴직하겠다"고 냉정하게 통보했다. 아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직장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인연이 이어지려고 그랬던 것일까. 당시 월급 77만원을 받을 때였고, 12평짜리 사택에 거주할 때였다. 회사에도 사퇴를 통보했으니 사택에서도 나와야 했다. 게다가 월급의 네다섯 배나 되는 수백만 원의 병원비도 감당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그 상황에서 정 대표가 병원비를 납부하고도 자신에게는 전혀 생색을 내지 않았다. 결근한 보름치도 유급으로 계산해 월급을 줬다. 알고 보니 "사장은 찾아가지 말라"고 했는데, 일이 다급했던 만큼 공장장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부탁했던 것"이었다.

김 공장장은 "개인적으로 정말 힘겨운 상황이었는데, 사장님이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이 회사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고, 떠나려는 기술자도 그가 앞장서서 붙잡았다. 그의 아내도 "더 많이 벌어오라고 하지 않을 테니 이 회사에 붙어있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기술자에서 관리자로 "기계 옆을 떠나라" 명령

2001년 회사는 세대교체를 단행한다. 옛 기술을 가진 고령자들이 2선으로 물러나고, 신기술을 가진 젊은 기술자들이 앞장서 신기술을 개발하며 본격적인 수출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당시 과장으로 발령받은 신 기술자들의 선두주자였던 그는 기계를 다루면서도 기술자들도 함께 관리해야 했다.

30대 중반 과장 시절의 김정호 공장장. 당시 사진을 함께 찍은 직원들은 모두 20대 초반이었고, 1명을 빼곤 모두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다. 뒷줄 서있는 사람 중 두 번째가 김 공장장이다. [사진=김정호 개인 소장]

사람을 관리해본 적이 없던 그는 첫 한 달 동안 기계 옆을 떠나지 못하고 이전처럼 일했다. 당연히 기술자 관리가 소홀해졌다. 이에 정 대표는 김 공장장에게 "기계 옆을 떠나라. 기계에는 30%의 시간만 투자하고, 나머지 70%의 시간은 기술자 관리에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공장 안에 그를 위한 사무실 한 칸을 특별히 만들어줬다.

그때부터 그는 직원들과 어울렸다. 틈날 때마다 함께 축구를 했고, 등산했으며, 회식을 하면서 그들의 가정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자신이 선배들에게 배웠던 것처럼 일이 끝나면 원하는 직원들에게 한 시간씩 기계를 분해·조립해 가면서 설비와 기술을 가르쳤다.

열심히 하는 직원들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정 대표에게 "직원들에게 가끔 금일봉을 주면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그랬더니 정 대표는 "금일봉 얼마나 되겠느냐"면서 "전 직원에 성과급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듬해 초 전 직원은 두둑한 성과급을 받았다. 업계 최초다. 2002년 당시 직원에게 성과급을 주는 중소기업은 없었다. 직원들이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공장 이전 6개월 전 먼저 천안 이사 "함께 가자" 설득

2010년 8월 안산 반월공단에서 천안으로 본사와 공장을 이전한다. 도심에 인접한 반월공단과 달리 천안은 산속 텅 빈 부지에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직원들이 이전을 꺼리면서 인력 이탈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조그마한 기술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경쟁사에서 '인력 빼가기'가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다.

김 공장장이 먼저 나섰다. 그는 공장 이전 6개월 전인 2월에 천안으로 먼저 이사한 뒤 반월공단 인근에 고시텔을 얻어 생활하는 강수를 두며 "함께 가자"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그동안 직원들과 밤낮없이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나눈 보답일까. 피치 못할 가정사로 안산을 떠날 수 없었던 두어명을 빼곤 모두 천안으로 내려왔다. 당시 함께 일하던 직원 대부분은 지금도 공장에 남아 고참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그의 기술은 공장의 천안 이전과 동시에 빛을 발했다. 세 동에 달하는 공장의 배치도와 각 공장 내부의 설비 배치도를 김 공장장이 그렸다. 그 배치도에 따라 모든 건물과 설비도 직접 설치했다.

자신이 직접 그린 공장의 설비 배치도를 설명하는 김 공장장. [사진=김종화 기자]

그의 경험에 따라 모든 공정의 표준시간표를 만들어 그 시간표에 따른 일·주·월 단위의 생산 수량을 측정해 계량했고, 개인별·팀별 작업량이 자동으로 할당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이 바로 국내 제조기업들이 도입하려 애쓰는 '개인 목표 생산성 관리 POP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 따라 주문을 받으니 납기 일정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었다. 그러자 공장의 생산성도 높아졌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여유와 역량도 생겼다.

기존 제품 절반 생산 중단, 신기술 개발에 집중

천안으로 이전하자마자 김 공장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존 제품의 절반을 생산 중단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 대표와도 의견이 일치했다. 대신, 대형 사이즈의 제품 만드는 등 신기술 개발에 열중했다. 일반 볼트 제조사에서 150㎜ 이상의 대형 볼트를 만들기는 어렵다. 볼트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기계와 설비 제작이 어렵고, 단조와 냉간·열간 등 다양한 부분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공장장의 주도로 신진화스너공업은 지름 5㎜, 길이 300㎜의 스테인리스 냉간단조 육각볼트를 세계 최초로 개발·생산했다. 또 세계 최장인 길이 450㎜, 무게 5㎏의 볼트도 생산·수출하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기에 사용되는 길이 450㎜ 이상의 특수볼트 하나의 가격은 1억원 이상이다. 내구성이 뒷받침돼야 만큼 기술이 없는 회사에서는 만들 수 없는 제품이다. 이런 역량을 인정받아 2020년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표창을 받은 김 공장장. [사진=김정호 개인 소장]

이런 노력으로 신진화스너공업은 매월 350t가량의 스테인리스강과 합금강·특수강을 사용해 세계 최대, 세계 최고의 볼트를 소량·다품종으로 100% 주문생산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유럽·일본 등의 유명 선박회사와 건설·해양플랜트 기업, 국내에서는 한화오션 등에 특수볼트 등을 납품해 연간 5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김 공장장은 캐드, 선반, 밀링머신, 지게차 등 못 다루는 기계와 장치가 없을 정도로 만능이다. 김 공장장이 개발·개량한 장비만 16종에 달하고, 특허도 1건이 있다. 그가 특허를 보유한 '찍힘 방지 장치'는 순간적인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볼트 최종 생산공정을 거쳐 방금 만들어진 볼트는 거대한 기계의 크기만큼 높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충격으로 볼트에 크렉(균열)이 생기는 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면 된다'는 단순한 명제에 따라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스케치해 설계하고, 용접기로 후다닥 만든 것이 찍힘 방지 장치다. 몇 번의 개량을 거쳐 이 장치는 세계시장에서 획기적인 평가를 받았고, 해외 제조사들도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은 사장님"

수출하기 전 포장 단계의 완제품을 설명하는 김 공장장. [사진=김종화 기자]

그의 좌우명은 '삼정(三正)'이다. 바른 마음(正心), 바른 행동(正行), 바른 일(正事) 세 가지를 늘 강조한다. 바른 마음을 먹으면, 바른 행동이 나오고, 바르게 행동하면 매사에 바르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일이 힘들면 불평을 할 수도 있는데, 불평하더라도 일을 제대로 하려 애써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3정'이 필요하다. "평소에 3정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주변에서 돕는다"면서 "누구도 돕지 않으면 자신이 도와주겠다"라고도 했다.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한성 대표에게 받은 은혜를 후배들에게도 베풀겠다는 의지다. 정 대표는 기술 관련 출장은 그가 먼저 권했고,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기술 관련 교육뿐 아니라 삶의 교양도 쌓아야 한다면서 '황혼이혼 안 당하는 법'이라는 강연을 들으라면서 일본까지 출장을 보내기도 했다.

김 공장장은 "사장님은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면서 "부모님이 나를 낳으셨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은 사장님"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했더니 정 대표는 "김 공장장은 우리 회사의 보배"라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역할을 함께 맡은 정 대표가 중소기업계에서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수의 한마디

최고의 기술자가 되려면 멀티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요즘은 한가지 기술만으로 전문가라고 불리지만, 최고의 기술자는 업무와 연관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계설계 전문가라면 설계만 할 줄 알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설계하는 기계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기계를 만든 원자재를 어디서 들여오며, 이 기계가 활용하는 공구가 무엇인지, 이 기계와 연관되는 기술이 무엇인지 등등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기계설계를 할 수 있고,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저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멀티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바이오중기벤처부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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