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오면 환자가 병원을 못와요'…난임 전문의는 왜 제주에 갔나[난임상경기]

④ 수도권 난임 전문의 3人의 이야기

편집자주합계 출산율 0.72명 시대. 서울의 유명 난임 병원 앞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동서고금 유례없는 저출산 추세가 무색할 정도다. 지난해 전국 난임 환자는 25만명. 모든 의료 인프라가 서울로 집중된 현실 속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원정 치료'를 떠나는 지방 난임 부부들은 오늘도 고통받는다.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이 임신, 출산을 간절히 바라는 난임 부부들의 앞길을 막는다. 저출산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갖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지방 난임 부부의 원정 치료 실태를 들여다본다.

"제주도에 사는 환자들이 날씨 때문에 진료를 못 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장마철이나 태풍이 올 때 비행기가 안 뜨면 방법이 없는 거죠. 명절 전후로는 비행기표 구하기 힘들어 고생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난임 전문 병원 감자와눈사람의 김영상 원장은 지난달 '지방 환자를 보는 과정에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병원이 공항 근처인 데다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직행하는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보니 바다를 건너야 하는 제주도에서까지 환자가 방문한다. 약 3000명의 난임환자가 있는 제주의 난임 시술 의료기관은 4곳(올해 3월 기준)에 불과하며 그 중 체외수정(시험관) 시술이 가능한 곳은 단 1곳뿐이다. 김 원장은 "환자가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덜 올 수 있게 궁리한다"며 난임 시술 방법 중 일정을 비교적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방식을 활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가 2022년 정부의 난임 시술 의료기관 2차 평가 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2021년 정부 지정 난임 시술 의료기관 233곳(평가 이후 폐업 병원은 제외)에 소속된 산부인과 전문의는 총 1488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난임 시술 의료기관 111곳에 산부인과 전문의 60.7%(903명)가 소속돼 있었다. 난임 시술 의료기관이 적은 지역일수록 산부인과 전문의 수도 적을 수밖에 없다.

지방 난임 부부들이 고생해서 달려오면 덩달아 고민하는 사람들이 바로 의료진이다. 전문의들은 새벽에 출발해 서울 병원에 도착, 오랜 시간 대기했다가 짧게 진료받고 오후 비행기로 다시 귀가해야 하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대표적인 난임 치료 방법인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면 한두 달 내에 최소 다섯 차례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개인이 편한 시간에 일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체리듬에 따라 초음파 검사 등이 이뤄지는 만큼 의료진이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환자의 내원을 줄여주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 환자 중에도 지방에서 오는 분이 있는데요. 저는 가급적 오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 고생하는 걸 아니까요. 기술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지역 병원을 가시라 권합니다. 그래도 오시면 가급적 병원에 덜 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데요. 한계가 있어요. 환자의 몸 상태를 (검사로 확인하지 못하니) 예측해서 약을 처방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사의 경험 차이가 분명 영향을 줄 겁니다."

난임 전문의인 이재호 일산마리아병원 원장도 평소 진료 중 제주에서 오는 환자들을 종종 만나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보제공 편차라도 줄여주자는 마음에 그는 지난 4월 직접 제주도로 향했다. 토크콘서트 형태로 지방 난임 환자가 궁금한 점을 해소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5년 전부터 난임 환자에게 의학적인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유튜브를 운영해온 그는 자신의 채널에 토크콘서트 개최 소식과 함께 어느 지역을 방문할지 설문 조사했고, 그때 1위로 지목된 지역이 바로 제주였다고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제주의 난임 환자 수는 약 3000명(2023년 기준)이다. 이 원장은 지방 난임 부부들을 위해 내년 초 다시 궁금증 해소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난임 전문의들에게 난임 시술을 받는 환자가 병원을 자주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시술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난임 진료는 기본적으로 호르몬의 변화를 꾸준히 지켜보며 상황에 따라 진행된다. 예를 들어 시험관 시술 중 핵심 절차인 난자 채취를 하기 위해서는 호르몬 주기에 따라 난자가 가장 성숙한 시점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검사가 꼭 필요하다. 그렇게 검사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견돼 치료 방향을 바꾸는 일도 생기고 시술 후 응급 상황 등이 생기면 갑작스러운 내원이 불가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통 접근성 좋은 서울 난임 병원은 그야말로 지방 난임 부부들이 찾는 명소가 된다. 서울 기차역 바로 앞에 위치한 서울역 차병원 난임센터는 항상 환자로 북적인다. 지난달 기자가 방문한 병원에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대기 중인 난임 부부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이 병원의 조은혜 교수는 "진료를 보다 보면 지방 난임 환자가 계속 증가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에 비해 서울에 더 많은 병원과 의료진이 있다 보니 선택의 폭이 넓고, 병원 규모나 시스템이 임신 성적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환자를 서울로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가 만난 전문의들은 지방 난임 부부가 장거리를 이동할 경우 치료 성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이를 구체적으로 측정한 연구가 진행된 적은 없지만, 체력적인 부담과 스트레스, 재정 부담이 시술 결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조 교수는 "교통수단에 한계가 있어 경제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다. 교통편 때문에 환자가 못 온다고 하면 다른 날로 예약을 잡아드려야 하다 보니 (시술하는 과정에서)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기획취재부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