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준기자
북한 주민들이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피해 가상사설망(Virtual Private Network·VPN)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김정은 정권이 외부정보 유입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지만 '정보 접근'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1일 글로벌 보안기업 레코디드 퓨처(Recorded Future)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인식트 그룹(Insikt Group·위협 분석조직)은 2023년 1월부터 올해 3월 사이 고유한 북한 IP 주소 31개가 서로 다른 VPN 또는 프록시 서비스 35개와 통신하는 것을 관찰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국경 봉쇄령으로 북한 내에 외국인이 거의 없던 시기인 만큼 이 같은 VPN 접속 흔적은 주민들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설명이다. 앞서 2020년 조사 당시에는 북한 내 특권층의 VPN 이용량에 집중했었지만 이번에는 일반적인 주민들이 국내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VPN을 이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VPN은 사용자의 IP 주소를 숨기고 암호화된 연결을 통해 인터넷 트래픽을 VPN 서버로 우회한다. 온라인에서 개인정보를 보호하거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쓰이지만 접근이 통제된 특정 인터넷망에 접속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조선중앙통신·노동신문 등 북한 사이트에 접속하려면 VPN을 통한 우회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에서 일반 주민들은 대부분의 국가처럼 공개적인 인터넷이 아닌, '광명망'이라는 인트라넷을 써야 한다. 명목상 '조선콤퓨터중심 내나라정보쎈터'가 운영하지만 당국으로부터 엄격한 검열과 감독을 받는다. VPN 이용이 늘고 있다는 건 북한 주민들이 외부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당국의 감시를 적극적으로 회피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북한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VPN 서비스는 Hotspot Shield(63.2%)·ExpressVPN(16.1%)·Private Internet Access(10.6%)·Psiphon 3(5.1%) 등 순으로 나타났다. 앞선 3가지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이용되는 서비스라면 Psiphon 3의 경우 인터넷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 설계된 VPN이란 게 인식트 그룹의 설명이다.
인식트 그룹은 "북한 주민들이 VPN이나 프록시 서비스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관찰해왔지만 국내 감시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난독화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는 효과적인 대북 정보 유입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이런 동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수곤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IT·시스템 보안 담당관은 "북한 내부에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VPN 사용이 증가하는 동시에 보안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VPN 사용 증가는 외부정보 접근이 중요한 우선순위라는 점을 나타낸다"며 "북한 내부의 안정성과 국제적인 정보 유입에 미칠 영향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선 북한 주민들이 보안을 위해 백신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해외에 있는 주민들이 북한에서 발생한 사건과 정책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공식 뉴스 웹사이트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기록도 관찰됐다. 특히 인식트 그룹은 북한 주민들이 애플·삼성·윈도·화웨이 등 외국 기기와 기술을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자사 제품이 북한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러시아와 중국에 제품을 재판매할 수 있는 기업 등에 대해 적절한 실사를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