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手談)]‘바둑 女帝’ 독주 시대의 균열

‘바둑 여제(女帝)’ 최정 9단의 독주 체제에 제동이 걸렸다. ‘천재 소녀’ 김은지의 급부상은 12월 바둑계를 뜨겁게 달군 뉴스다. 김은지 8단은 지난 19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7회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3국에서 최정을 꺾고 승자가 됐다.

단 한 판의 대국 결과에 바둑계가 술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날 김은지는 바둑 역사를 새로 썼다. 바둑에서 9단을 일컫는 ‘입신(入神)’의 자리에 올랐는데, 종전의 최단기간 9단 승단 기록을 6개월 앞선 새로운 기록(3년 11개월)을 세웠다.

어떤 바둑 기사보다 빠르게 8단에서 9단으로 승단했다는 얘기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입신은 프로 바둑기사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지난 10월3일 중국 항저우 치위안 체스홀에서 열린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여자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김채영, 오유진, 김은지, 최정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김은지의 입신 기록이 더 놀라운 것은 역대 최연소 9단이라는 점이다. 2007년 5월에 태어난 김은지는 16세 6개월 만에 9단이 됐다. 이는 17세 11개월에 입신에 이르렀던 박정환 9단의 최연소 기록보다 17개월 빠른 결과다.

또래 친구들은 여고생으로서 꿈과 희망을 키울 나이인데 김은지는 바둑이라는 영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6살 때 바둑을 시작한 김은지는 어린 시절부터 기재(棋才)를 인정받았다. 김은지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천재 소녀의 질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바둑계가 그의 이름에 주목하는 이유는 최정이라는 절대 강자의 존재를 위협할 인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 여자 바둑은 최정의 독주시대였다. 바둑 통계 사이트인 ‘고 레이팅’이 집계하는 세계 여자 바둑 랭킹 1위는 2017년부터 2023년까지 7년 연속 최정이었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등 어떤 여자 바둑기사도 최정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지난 10월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금메달을 예상한 이가 많았던 이유다. 한국은 은메달을 차지했다. 최정이라는 이름값을 고려할 때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남자 바둑 단체전보다는 여자 바둑 단체전 금메달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최정의 무게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최정은 결승에서 중국에 일격을 당했다. 이는 한국 준우승의 배경이 됐다. 바둑 여제의 힘이 이제 빠진 것일까. 그동안 홀로 외로운 질주를 거듭했기에, 숨 고르기를 할 때도 됐다.

때마침 후배 기사 김은지의 급부상은 최정에게 좋은 자극제로 다가올 수 있다. 장거리 마라톤에서도 실력이 좋은 경쟁자가 있을 때 더 좋은 기록을 내게 된다. 김은지는 역대 최연소 입신이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최정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면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두 사람 대결에서 김은지가 승리한 게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그동안의 상대 전적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두 사람의 상대 전적은 그동안 3승 13패로 김은지가 열세였다. 김은지의 기세가 만만치 않지만, ‘최정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정은 지난 22일 제28기 하림배 프로여자국수전에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얼마 전 해성배에서 지면서 괴롭긴 했지만 승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정은 마음고생을 털어버리고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최정의 재도약은 2024년 여자 바둑 판도에 새로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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