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슬기나특파원
매년 이맘때면 미국 뉴욕에서 진행되는 록펠러센터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은 현지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꼽힌다. 1931년부터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을 알려온 상징적인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록펠러센터 일대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개최됐다. 무게 12t, 높이 80피트의 트리에는 꼭대기에 위치한 별 모양 크리스털 외에도 무려 5만개 이상의 LED 전구가 장식됐다. 트리를 감싼 LED 전구용 전선 길이만도 무려 8㎞에 달한다. 점등 장면과 이에 앞서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축하공연은 NBC방송을 통해 미전역에 생중계됐다.
세계 각지의 수많은 사람들은 단지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뉴욕을 찾는다. 하지만 올해 트리 점등식이 마냥 축제 분위기였던 것만은 아니다. NBC방송의 생중계에는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총출동해 캐럴을 부르고 현장에 모인 이들이 기뻐하는 장면이 주로 담겼지만, 바로 인근 거리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해 친팔레스타인 시위로 충돌이 벌어졌다.
이번 시위는 일찌감치 예고됐다. 점등식 당일이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이었던 데다, 한 주 앞서 맨해튼에서 진행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에서도 시위대의 난입으로 행사 차질이 빚어졌던 탓에 뉴욕경찰(NYPD)의 경계도 한층 삼엄했다. 이 가운데 당초 트리 인근 뉴스코퍼레이션 빌딩 쪽에 집결한 시위대가 점등식이 열리는 곳으로 행진을 시작하자, NYPD가 막아서면서 충돌이 커졌다. 온라인 등에 공개된 영상을 살펴보면 ‘집단학살을 반대한다’, ‘그때도 집단학살, 지금도 집단학살’ 등의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시위대는 점등식 무대로까지 진입해 팔레스타인 국기와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결국 충돌이 심화하며 일부 시위대는 체포됐다. 시위 주최 측 관계자는 "집단학살을 위한 자금에 미국의 달러가 사용되고 있다"면서 이날 시위가 트리 점등식 행사를 뉴욕주민들과 집단학살 반대를 위해 연대하는 교육적인 순간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점등식을 보기 위해 현장을 찾은 이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놨다. 코네티컷에 거주 중인 라이언 씨는 "이곳은 미국이고 뉴욕이다. 누구든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고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행복한 크리스마스 연휴 시즌을 알리는,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을 행사를 정치적 의도로 장악해서는 안 된다는 불만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년남성은 "방법이 잘못된 것 같다"면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여주는 것이 갈등, 충돌의 순간이 돼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어린 자녀 등 가족과 함께 현장을 찾은 이들에겐 자칫 시위가 폭력으로 확산할 수 있음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전해졌다.
화려한 점등식 뒤에서 시위대가 외친 "집단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선 수많은 민간인, 특히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재차 상기시킨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병원마저 공격하는 무자비한 전쟁으로 확대된 지 어느새 두 달이 다 됐다. 그간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어린아이들만 수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 개개인의 관심은 초기보다는 약해진 듯하다. "당신은 오늘 얼마나 많은 아이를 죽였습니까."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인파에 던진 질문에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