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보 하루천자]'후암동 실핏줄 골목길 인상적…부다페스트선 3만보 걸어'

'도시탐험가' 이종욱 건축가, 도시산책=보물찾기
여러 번 걸으니 시공간·역사적 의미까지 알게돼
도시산책 그림 100점 쌓여…타인과 공유하고 싶어져

이종욱 건축가(45)는 일명 ‘도시 탐험가’다. 도시 건축물의 설계 구조와 그 건축물을 품고 있는 길의 이미지를 그려낼 때까지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가 2021년 펴낸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은 서울역을 중심으로 원도심 일대를 수십 번 걸어 그림으로 표현한 결과물이었다. 서울에선 익숙한 거리지만 쉽게 포착하지 못한 풍경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나타냈다.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삼성전자 베트남 단지, 미국 가전단지 등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도시 이미지와 어울리는 건축물을 그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리의 진면목을 알 때까지 걷는 습관에 있었다고 했다.

이 건축가가 도시 산책에 빠지게 된 건 대학 시절 ‘사진 촬영과 감상’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부터다. 사진을 찍기 위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걸었다. 건축 공부와도 연계됐다. “저에게 도시 산책은 일종의 보물찾기였습니다. 마치 아이돌 팬에 열광한 소녀 팬과 같은 열정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건축물이 웅장하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어도 평범함이 묻어나는 건축물의 구석구석에서 그 건축물이 품고 있는 양식, 역사, 공법을 읽어내는 게 흥미로웠다고 했다.

이종욱 건축가가 도시 산책을 하고 기록한 그림 <사진=본인제공>

이 건축가는 처음에는 걸은 길을 복기하고 기록한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건축물의 이름, 용도가 무엇인지를 거시적으로 알기 위해서다. 같은 길을 여러 번 걷다보면 처음엔 보지 못했던 주변의 기념비, 표지석 등 작은 것들을 파악하게 된다. 그는 “모두 그림에 담아 도시의 시·공간을 내것으로 만드려고 했다”며 “마지막엔 이 길의 역사적 의미까지 알게 됐다”고 했다. “걷기는 일종의 소유욕에서 비롯됐다”고도 했다. 그는 도시 산책을 통해 담은 도시 그림이 100점 가까이 쌓였을 무렵엔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산책로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 곳곳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길이라고 했다. 이씨는 “여느 평범한 동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길 옆 곳곳에 단층 건물과 아담한 문화주택이 자리해 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아늑한 느낌이 좋다”고 했다. 만삭이었던 아내와도 후암동 담벼락을 배경 삼아 찍었다. “거부감 없이 포근하게 안기는 느낌이랄까요? 효창공원에서 숙대앞 청파로47길을 지나 숙대입구역 교차로를 지나 두텁바위로 1길을 따라 후암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후암3거리에서 남산까지 오르는 코스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이 건축가는 건축 일 특성상 해외 프로젝트로 인한 출장이 잦다. 덕분에 해외의 도시 곳곳을 걸을 수 있었다. 2016년 베트남 호치민에 머물 때는 겁도 없이 빈민가 도시 구석까지도 걸었다. 2018년 8개월간 이어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장에서는 주말 오전마다 인근 도시인 콜롬비아, 샬럿 가끔은 조금 먼 애틀랜타로 차를 몰아, 하루 동일 발이 닿을 수 있는 도시 곳곳을 걷고 사진을 찍었다. “가장 걷기 좋았던 해외 도시는 2021년 한달간 다녀갔던 헝가리 부다페스트였습니다. 퇴근 후 유명 관광지인 부다성이나 어부의 요새, 겔레르트 언덕, 다뉴브 강가를 매일 같이 걸으며 저녁시간을 보냈는데, 하루에 최소 만보 많게는 삼만보를 걸었습니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후암동 골목길은 이종욱 건축가가 좋아하는 산책로다. <사진=아시아경제 DB>

그럼에도 이 건축가는 “조금 오래된 동네에 난 길이 좋다”고 말한다. 실제 그의 그림엔 1980~1990년대 많이 지어진 붉은 벽돌집이나 ‘○○문구’ 등 예전 학교 앞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점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게 많다. 그는 “산책의 진수는 도시 속에 담겨있는 시간을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신도시나, 완전히 재개발돼 옛 도시의 시간을 읽어낼 만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곳은 아무리 말끔하고 세련되게 정비가 되었더라도 걷는 재미는 없어요.”

도시 산책을 즐겨하는 까닭에 목적지를 두고 빙빙 돌아가는 습관도 있다. “건축물과 주변 풍경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매번 달라져요. 주변 경관에 묻혔을 때 변화하는 느낌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이 건축가에게 산책이란 걷기와는 다른 개념이다. 걷기는 단순히 런닝머신 위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라고 봤다. 반면 산책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친숙해지면 장소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생기게 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는 “컴퓨터, 핸드폰으로 어떤 것을 봐도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디로든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발로 걸어서 본 세상은 화면 속에 나타난 세상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했다.

바이오헬스부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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