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보 하루천자]'만년필 찾아 벼룩시장 누비다 보니 건강은 덤'

매일 필사하고 만보 걷는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
주중엔 회사원, 주말엔 무료로 만년필 수리도
어린시절 희귀 만년필 구하려 수시로 발품 팔아
글씨 쓰면서 생각 정리하고 감정 털어내기도
만년필 이어 붓글씨 배우며 동서양 필기구 섭렵중

[아시아경제 조인경 기자] "글을 쓸 때 만년필만큼 재미난 필기구가 없어요. 손끝으로 느껴지는 펜촉의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터치감,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나는 '스윽 쓱싹' 소리, 잉크의 향과 발색, 종이의 질감까지 매번 그 느낌이 다르거든요."

서울 을지로3가 인쇄소 골목, 오래된 건물 한 켠에 별다른 간판도 없이 자리한 만년필연구소. 수백 자루의 만년필과 펜촉, 아무렇게나 놓인 잉크통과 서적, 종이 뭉치들 사이에 겨우 두어 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 공간이 바로 박종진(52·사진) 소장의 작업실이다. 그는 평일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밥벌이를 하고, 주말엔 전국에서 찾아온 만년필 애호가들의 고장 난 애장품을 무료로 수리해주는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만년필 전문가'다. 어린 시절부터 만년필에 매료돼 온갖 만년필을 수집하고, 만년필을 일일이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며 독학으로 만년필을 연구해왔다. 만년필에 들어가는 잉크를 바꿔가며 써보다 직접 제조해 사용하고, 좋은 만년필이 싸게 나왔다거나 희귀한 만년필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열 일 제쳐두고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만년필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아 <만년필입니다!>,<만년필 탐심>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두 권이나 냈다.

지난달 26일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만년필연구소'에서 박종진 소장이 자신의 소장품인 만년필과 각종 필기구, 직접 쓴 필사노트를 펼쳐 보이고 있다. /윤동주 기자 doso7@

그가 2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PENHOOD)'는 남녀 불문 다양한 연령층의 회원이 꾸준히 늘어 그 수가 무려 4만6000명을 넘는다. 박 소장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되고 모든 게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있지만, 한편으론 마음을 가다듬고 혼자서도 집중할 수 있는 글씨 쓰기, 필사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고 있다"며 "최근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유행을 타고 젊은층, 특히 여성들이 예쁜 글씨의 매력에 빠져 만년필의 세계에 입문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글씨는 개성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 잘 쓰냐 못 쓰냐 우열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박 소장의 일과는 새벽 필사로 시작한다. 주로 전날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을 노트 위에 만년필로 정성 들여 적는다. 이날은 최근 읽고 있는 <곰브리치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옮겨 적었다며 보여줬다. 때로는 일기를 쓰거나 나중에 글로 쓰고 싶은 생각을 메모 형식으로 적어두기도 한다. 그는 "이른 아침,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다 보면 머릿속 이런저런 생각들이 차분히 정리된다"며 "보통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글 쓰는 훈련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게 자신의 인지능력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때로는 흉허물없는 친구에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듯,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그 상황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가다 보면 우울하고 괴로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툭툭 털어버리게 된다. 박 소장은 "흔히들 만년필을 비싸고 돈 많이 드는 취미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저렴한 만년필이 고장도 잘 나지 않고 부담 없이 쓰기 좋다"며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3만원대 '라미 사파리', 또는 그보다 저렴한 만년필부터 구해 필사를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이 평소 인상 깊게 읽었던 책 구절을 노트 위에 만년필로 옮겨 적고 있다. /윤동주 기자 doso7@

2년 전부턴 일주일에 한 번 유명 서예가를 찾아가 붓글씨도 배우고 있다. 동서양 필기구의 세계를 완전히 섭렵해 보겠다는 목표에서 시작했는데, "붓이라는 도구는 너무나 완벽해 다루기가 매우 어렵더라"는 게 그의 소감이다. 박 소장은 "몽블랑 만년필 전문가라면 몽블랑만 연구할 게 아니라 파커나 워터맨 같은 다른 브랜드 제품까지 파고들어야 하듯, 만년필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볼펜이나 연필, 만년필이 나오기 전 깃털펜까지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런 맥락에서 붓에서 시작해 벼루, 먹에 대해 배우고 붓으로 쓰는 각종 필체를 익히고 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서양의 만년필은 동양의 붓글씨에 비하면 엄청 쉬운 편이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작업실 입구엔 무형문화재 필장(筆匠)이 만들었다는 곰털로 된 큰 붓부터 양털, 족제비털, 인조모 등 다양한 모질의 서예 붓이 걸려 있었다.

책상에 앉아 글씨를 쓰고 골방에 갇혀 만년필을 수리할 때가 가장 행복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지만 박 소장은 매일 1만보를 거뜬히 걷는 걷기 마니아기도 하다. 서울에 극심한 한파가 몰아쳤던 지난달 25일에도 그의 스마트폰 앱에는 8400보가 찍혀 있었다. 박 소장은 "아마 만년필을 구하느라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옛 만년필 자료를 찾느라 도서관이나 고서점을 헤집고 다니던 젊은 시절부터였을 것"이라며 "지금도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틈날 때마다 인근 광장시장이나 남대문시장을 걷다 수입 문구 코너를 들려 구경하는 게 일상의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만보걷기 코스 중 하나로 일요일마다 열리는 '신설동 벼룩시장(서울풍물시장)'을 추천하면서 그곳에서 '득템'했다는 커다란 벼루도 자랑했다. 최소 구한 말 시기 우리나라에서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를 골동품 상점에서 현금 몇십만원을 쥐여 주고 냉큼 들고 왔다고 했다.

박 소장은 "건강하게 잘 살려면 자꾸 자리에 눕거나 늘어져 있으면 안 된다"면서 "저처럼 좋아하는 일(만년필)에 푹 빠지고 부지런히 걸으면 심심한 겨를도, 배가 나올 일도 없다"고 으쓱해 했다. 대신 만년필을 자세히 들여다보느라 눈이 쉽게 피로해지니 가급적 텔레비전을 멀리하고, 이른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잠드는 편이다. 그는 "취미를 위해 다른 지출을 아끼느라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강 관리도 되더라"며 웃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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