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민기자
[아시아경제 류태민 기자] "서울은 공공적 질서가 없는 도시입니다." 최근 서울의 도시 형태를 분석한 저서 '서울 어바니즘(Urbanism)'을 출간한 이상헌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도시 서울'을 이같이 평가했다. 어느 도시보다 복잡한 규제들이 수두룩하지만, 도시경관의 일관성과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교수는 “우리가 서울의 잠재적 질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이 점점 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수많은 도시계획과 복잡한 규제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도시가 일관성 있게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울의 도시 형태에 대한 이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지구단위계획은 서울의 도시구조와 도시경관에 대한 해석과 비전에 근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교수는 “도시 형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전망에 근거하지 않은 계획은 아무리 쏟아져도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18일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건축관 연구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신간 '서울 어바니즘'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서울 어바니즘'의 주제는 한 마디로 서울의 도시 형태 읽기다. 서울은 도시 형태가 독특한 도시다. 다른 서양 국가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남다른 특징들이 많이 숨어있다. 하지만 발전 과정에서 어떠한 거대한 형태적 틀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때마다 개별적인 단위의 계획을 수립해 건물을 짓다 보니 도시 형태 계획에 대한 전통과 이론이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앞으로 서울이 어떤 도시 형태를 갖춰 나갈지 정체성을 찾는 것이 이번 저서의 목표다.
-‘어바니즘’은 무엇인가.
▲우리말로는 ‘도시설계’, ‘도시계획’, ‘도시건축’ 등으로 번역된다. 바르셀로나를 계획한 엔지니어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이는 19세기 이후 도시의 급속한 팽창과 사회, 경제, 기술적 변화에 대응해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과 계획, 전략을 말한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와 베를린을 연상하면 금방 떠오르는 도시 형태의 모습이 그들의 어바니즘이다.
-서울은 왜 정체성이 부족했나.
▲‘건축’이 아닌 '건설'과 ‘부동산’ 위주로 건물이 지어져서다. 현재 서울은 구체적인 형태 디자인보다는 추상적인 지역계획과 평면적인 도시개발에 의해 만들어졌다. 특히 건설과 부동산은 개발 이익을 추구하는 게 목표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도시가 어떤 형태가 될지 전망하면서 3차원적인 큰 틀을 마련하지 않고, ‘일단 돈이 많이 벌리는 대로 짓고 형태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기조가 강했다. 하지만 이제는 서울의 도시개발이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존에 지었던 어설픈 도시공간을 세련되게 다듬고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더 긴밀히 조직함으로써 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숙제라고 본다.
-서울 어바니즘은 어떻게 수립할 수 있나.
▲서울이 가진 특성들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은 500년 이상 봉건제도의 성곽도시였지만, 근대화가 시작된 20세기 들어 급속도로 팽창했다. 거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대도시처럼 명확한 확장계획에 의해 일관성 있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파편적으로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서울도 계속 이어져 내려온 도시형성의 원리와 문화가 숨어있다. 비판과 공유를 통해 이들을 찾아내서 담론화할 수 있는 서울의 도시 형태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이후 이론이 밑바탕이 되는 ‘공적 규범’을 토대로 체계적인 도시설계가 이뤄져야 서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공적 규범’을 수립할 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도시적 맥락이다. 이는 일종의 전통적인 질서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예컨대 어떤 건물이 들어설 경우 도시의 전반적인 형태에 긍정적일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잠재적인 질서다. 서양에는 이러한 질서가 있다 보니 도시가 어떤 형태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발달해왔다. 반대로 서울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도시적 맥락이 없어 건축이 ‘개인주의’다. 그동안 제멋대로 짓는 걸 용인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흘러왔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이러한 질서는 지역별 특성에 맞게 수립돼야 한다. 서울은 한강을 기준으로 북쪽이냐 남쪽이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도시적 맥락을 찾아야 한다. 또 중요한 요소는 점진적 변화다. 서울을 신도시처럼 처음부터 싹 다시 만들 수는 없지 않겠나. 앞으로 짓는 건물들에 대해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면서 서울이 조금씩 조화를 이루도록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의 대도시를 롤모델로 삼으면 되나.
▲아니다. 서울과 유럽 대도시는 겉으로 보이는 형태도 굉장히 다를 뿐만 아니라 도시가 형성되는 원리도 큰 차이가 있다. 유럽 도시들은 대체로 필지가 모여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필지 위에 지어진 건물들이 모여서 빌딩 블록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도시가 구성된다. 반면 서울은 필지들이 모여서 블록을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필지들이 길에 접선하는 방식으로, 불규칙한 나뭇가지 구조로 뻗어나간다. 필지 위의 건물들도 각자 독립적인 형태다. 이를 ‘필지의 자유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서울의 도시 구조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우리가 잘 해석해서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살려 나가는 방향으로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서울의 도시공간을 세련되게 다듬는 재건축·재개발·도시재생 등의 정비사업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무엇인가.
▲슈퍼블록을 잘 살려야 한다. 슈퍼블록은 통상 한 변이 300m~1km에 이르는 큰 도시 블록을 말한다. 서울은 거대격자 체계의 간선 도로망에 의해 구획된 슈퍼블록의 도시다. 서울 구도심의 슈퍼블록 평균 크기는 양변이 500m 정도다. 강남에는 한 변이 800m가 넘는 곳도 있다. 뉴욕 맨해튼의 블록 장변이 180m에 불과한 것과 비교해보면 서울의 슈퍼블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정비사업은 이러한 슈퍼블록 단위와 무관하게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동네임에도 각자 생뚱맞은 형태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슈퍼블록 전체에 대한 큰 틀의 계획이 수립하고, 그 틀 안에서 세부적인 사항이 정해져야 한다.
-최근 서울의 '35층 룰'이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모두가 납득할 만한 기준이 없는 게 아쉽다. '35층 룰'의 폐지 자체는 좋고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한강변 아파트의 최고 높이를 35층으로 제한한 근거가 무엇인지, 어떤 원칙에 따라 폐지를 한 것인지 설명이 부족했다고 본다. 도시 계획의 큰 틀이 부재하다는 내용의 연장선이다. 건물 층수와 절대높이 제한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명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설득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서울의 가장 중요한 경관 요소가 자연이라는 점에는 모든 시민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공공영역의 중요한 지점들을 선정하고, 경관 시뮬레이션을 통해 건축물의 높이를 합리적으로 융통성 있게 규제한다면 시민들의 동의를 얻기 수월할 것이라고 본다.
<i>이상헌 교수는 1998년부터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실천적 건축 및 도시 이론을 모색 중이다. 서울대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건축역사 이론 비평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건, 정림건축, 인우건축 등에서 실무를 했으며 한국과 미국의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한국건축의 정체성> 등이 있으며, 한국 현대건축과 도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저술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i>
류태민 기자 right@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