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민기자
[아시아경제 오규민 기자] “분홍색 차선을 따라 운전하세요”
언제부턴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량 내비게이션이 색을 말해준다. 분홍색 또는 초록색 차선을 따라 가면 목적지로 쉽고, 안전하게 빠져 나갈 수 있다. 누가 처음 도로에 색을 칠할 생각을 했을까. 윤석덕 한국도로공사 안성용인건설사업단 공사관리팀 2공구 주감독(차장)이다.
노면 색깔 유도선은 분기점 등에서 차로 안내를 위해 노면에 시공하는 유도표시다. 2011년 영동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 처음 생긴 후 해당 구간 사고 발생 건수는 연간 20여건에서 3건 이하로 줄었다. 사고 감소율이 무려 85%다. 2015년까지 77개 유도선이 설치된 후 분기점에서 22%, 나들목에선 40%의 사고 감소 효과를 봤다. 현재 고속도로에만 유도선이 905개 있다. 시내 도로 등을 포함하면 이보다 많다.
윤 차장은 영동고속도로의 한 분기점에서 길을 헤맨 적이 있다. 서울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전남 목포 방향으로 빠졌다. 윤 차장은 이 때부터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쉽게 분기점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말이다. 고민하던 찰나 2011년 3월 안산 분기점에서 대형 사고가 났다. 4중 추돌사고가 일어나면서 2명이 사망했다. 사망사고가 난 그 날, 군포지사장이 윤 차장에게 “대책을 세워보자”고 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때 8살 딸과 4살 아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때 생각이 났어요. 도로에 색을 입히면 사람들이 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걸요”
도로에 분홍색을 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로교통법상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차로에는 흰색,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청색만 칠할 수 있었다. 윤 차장의 아이디어는 ‘불법’이었다. “경찰에서 입건한다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그럼에도 그의 아이디어가 안산분기점을 장식했다. 성과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2012년 한국도로공사 수도권 본부에 도로에 색을 칠하자고 건의했다. 경부고속도로 판교 분기점에 두 번째 유도선이 그려졌다. 윤 차장은 “그때도 여전히 불법이었는데 교통사고를 줄인다는 명분이 있어 규제를 받지 않은 듯하다”고 회상했다.
2014년 한국도로공사에서 내부방침을 통해 공식적으로 유도선을 인정했다. 2017년 국토교통부 노면 색깔 설치 관리 매뉴얼 발간에 이어 2021년 4월 도로교통법이 개정됐다.
그는 유도선을 만들면서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다. ‘불법’을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잡혀가더라도 한 번 시도는 해볼 걸이라는 생각도 해요” 또 누군가는 자신이 만든 것을 알아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옆에 있던 입사 동기가 ‘이거 누가했는지 아냐’고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윤 차장은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어 위안을 삼았다고 했다. ‘사망할 수도 있던 사람들을 구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제도가 잘못되거나 미비해서 받지 말아야 할 피해를 당하지 않고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게 보상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윤 차장의 공로를 세상이 인정한다. 2020년 방송 출연 후 한국도로공사 사장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2021년에는 도로의날에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시계를 선물 받았다. 지난해 개천절 행사에선 대한민국 의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히 금전적인 보상을 받은 기억은 없다. “돈 생각보다 누군가 제 일을 알아봐준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퇴직을 7년가량 앞둔 윤 차장에게 남은 목표가 있다. 블랙아이스(살얼음) 사고를 막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기 열선을 통해 도로를 녹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경제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겨울철 도로에서 생기는 피해를 줄이고 싶어요. 그런 다음 퇴직하면 후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떤 아이디어로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꿔 놓을지 궁금하다.
오규민 기자 moh011@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