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경영위기도 예측하라'…고무줄 잣대 '신의칙'

변화무쌍한 신의칙 기준에 기업 우려 높아
"가이드라인 명확하게 재정비해야" 목소리

[아시아경제 성기호 기자] 통상임금 소송의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다. 신의칙은 구성원이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상 대원칙을 말한다. 신의칙은 그간 통상임금 소송에서 근로자가 합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회사의 경영 상황 등을 감안해 요구를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적용돼 왔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에서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신의칙 항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변화무쌍한 신의칙 기준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법조계와 재계에서는 가이드라인을 명확하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간 대법원은 신의칙의 적용 범위를 지속적으로 줄여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2월 9년간의 갈등 끝에 결론이 난 현대중공업의 통상임금 소송이다. 법조계와 업계에서는 대법원이 이 판결을 통해 사실상 신의칙 항변을 배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 소송에서 ‘향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기업에 향후 경영 상태 악화 가능성까지 예측해야 신의칙을 적용하겠다는 취지다. 기업들에서는 이런 법원에 판단에 대해 "불가능한 요구"라고 지적한다. 코로나19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같이 돌발적인 변수에 대해 기업이 사전에 향후 리스크를 정확히 예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법원이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판단하는 것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금호타이어 통상임금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보면, 재판부는 ‘일시적인 경영 악화’라고 판단해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근로자에게 추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회사에 중대한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금호타이어는 여전히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파기환송심에서 패할 경우 우발 채무로 인해 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선고 시점에 대한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점도 문제다. 대법원이 선고 시점을 언제로 하느냐에 따라 경영상 어려움의 판단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민법상으로는 2심 변론종결시점을 기준으로 기업을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심리가 이뤄지는 동안의 사정들이 고려되지 않는는 점은 한계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이 경영 악화 가능성을 매번 정확히 예견하고 극복 가능성을 진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라며 "노사가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라면, 법원도 그것을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기호 기자 kihoyeyo@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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