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잠정 중단됐던 ‘영양 고추아가씨 선발대회’가 4년 만에 다시 열렸다. 고추농사가 흉작인 올해 이런 행사를 부활시켰다며 비판하는 기사를 보고 알았다. 별생각 없이 기사를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하필 ‘18세 이상 24세 이하 미혼 여성’만 대상으로 대회를 개최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양군 관계자가 내놓은 답 때문이었다. 남성은 군대나 취업 등으로 시간이 없고 기혼 여성은 결혼 이후에 활동이 어려워서 아가씨를 대상으로 했단다. 해당 지자체만의 또 다른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발언만큼은 동의하기 어렵다. 아가씨들은 취업을 안 해도 되나? 기혼여성의 사회활동은 오히려 더 지원해줘야 하지 않나?
미스코리아를 필두로 각종 미인대회가 앞 다투어 열리던 시대가 있었다. 기업에서는 마케팅 목적으로, 지자체에서는 특산품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의 얼굴과 몸매를 품평하고 점수를 매겼다. 말솜씨를 평가한다는 핑계로 무대 위에서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 풍경도 지방 축제 현장에서 종종 벌어졌다. 지자체 행사장에서 공개방송 연출을 자주 맡았던 필자도 여러 번 목격하곤 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미인대회는 하나둘씩 퇴출당했다. 고추아가씨 선발대회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놀라웠고 여전히 ‘아가씨’만을 대상으로 하겠다는 주최 측의 논리는 더 놀라웠다.
우리는 성별과 나이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 짓는다. 총각, 아가씨,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그런데 고추라는 특산물과 아가씨라는 집단이 짝지어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생각해보니 고추로 유명한 동네는 영양 말고 음성도 있다. 그래서 알아보니, 음성에도 고추아가씨 선발대회가 있었는데 이 대회는 고추 아줌마 선발대회로 바뀌었다! 미스터 고추 선발대회도 함께 열린다.
호기심이 발동해 다른 지자체의 경우도 찾아보았다. 포도로 유명한 경북 영천에서는 포도 아가씨 선발대회를 포도피플 선발대회로 바꾸어 개최하고 대상도 미혼여성에 국한하지 않고 남녀 가리지 않고 뽑기로 했다. 나이 제한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필자는 포도피플이 될 수 없다. 이런. 나도 포도 좋아하는데. 미스코리아 대회 다음으로 유명한 미인대회인 남원 춘향 선발대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심지어 이 대회는 코로나가 창궐했던 최근 몇 년 동안에도 꾸준히 21세기의 춘향이들을 배출했다.
어릴 때 결혼한 남편 단종이 사망하자 무려 60년을 수절했던 정순왕후를 기리는 선발대회도 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여성의 수절을 장려하냐는 비난을 의식했는지 행사 취지에서 수절이라는 표현 대신 주체적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비극적 삶은 안타깝지만, 그녀가 주체적 여성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51살이나 연상이었던 영조의 계비로 궁궐에 들어와 나중에 수렴청정까지 했던 또 다른 정순왕후(조선시대에는 정순왕후가 두 명 있다)라면 또 모를까. 어쨌든 작년까지도 정순왕후 선발대회는 열렸고 올해는 대면 행사 축소로 진행하지 못했다. 내년을 기약해달라는 안내가 있는 걸 보면 계속 열릴 모양이다.
독자님들은 이런 대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축제일뿐인데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옹호론도 있다. 바라건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특정한 성별과 나이로 대상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시대를 선도하지는 못할망정 역행하지는 말자.
이재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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