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기기자
[아시아경제 윤슬기 기자] "폭우요? 출근부터 해야죠."
장마철 폭우로 인해 물이 급작스럽게 불어나 침수 피해가 잇따르면서 시민들도 교통 이용 등에 차질을 빚었다. 하지만 이 같은 물난리 속에서도 직장인들이 출근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위험을 감수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에 책임감이 강하다는 반응부터, 안전이 걱정된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오전까지 서울과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비가 시간당 50㎜ 이상 쏟아졌다. 한때 비구름대가 북상하면서 인천과 경기 북부를 중심으로 비가 시간당 20~40㎜씩 내렸다. 특히 밤새 폭우가 쏟아진 수도권 일부 지역에선 침수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폭우가 직장인들의 출근길을 막지는 못했다. 경기 수원시 권선구 1호선 전철 세류역은 빗물이 밀려 들어온 탓에 지하통로가 침수돼 물이 발목 높이까지 차올랐지만, 이를 시민들은 당연한 듯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린 채 승강장으로 향했다.
이 같은 장면을 찍은 사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1호선 세류역 근황'이라는 제목의 글로 공유되기도 했다. 자칫 미끄러짐이나 감전 피해, 바닥에 떨어진 유리 등을 밟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지만 직장에 가기 위해 태연히 대처하는 모습에 네티즌들은 "K-직장인의 극한 출근", "직장인의 애환"이라는 반응을 내놨다.
그런가 하면 감전·미끄러짐 등 사고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직장인 김모씨(25)는 "직장인이라 침수 상황에서도 회사로 향하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면서도 "감전되면 어떡하려고 맨발로 출근하는지 걱정된다. 천재지변 속에서도 무조건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 눈이 오나, 비가 오나…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
지난 3월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에는 K-좀비물로 유명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패러디한 '지금 우리 회사는'이 공개됐다. 직장인들이 세상에 퍼진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돼 이성을 잃었음에도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한다는 설정으로, '전쟁이 나도 한국 직장인들은 출근한다'는 우스갯 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에피소드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웃프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리꾼 A씨는 "좀비가 된 직장인이 재난 속에서도 출근하고, 상사 커피에 침을 뱉는 장면에서 직장인들의 애환이 보였다"며 "재밌지만 현실 반영이 제대로 된 거 같아 슬프기도 했다"고 전했다. 실제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폭설이나 폭우가 내리는 등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심지어는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출근을 택한다. '내 휴가'지만 쉬는 게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코로나19 대규모 유행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해야한다는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는 등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에 정부도 '아프면 쉴 권리' 보장을 위해 나섰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오는 4일부터 내년 6월까지 1년간 서울 종로구, 경기 부천시, 충남 천안시, 전남 순천시, 경북 포항시, 경남 창원시 등 6곳에서 상병수당을 시범 운용한다고 밝혔다. 상병수당이란 업무 외 질병이나 부상으로 일을 하기 어려울 때 쉬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일정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다.
올해는 하루 최저임금의 60%를 적용해 4만3960원을 지급한다. 대상자는 시범 지역에 거주하고, 아파서 쉬는 기간에 유급휴가를 못 받는 모든 취업자다. 정부는 먼저 내년 6월 이후 시범 운용 성과를 지켜보고 국회에서 법률 개정을 거쳐 본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국가인원위원회도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지난 27일 인권위는 '아프면 쉴 권리'가 현재 업무상 상병에만 제한적으로 보장되고 있어 문제라며 모든 임금 근로자가 업무 외 상병에도 휴가·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를 추진하라고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인권위는 "현재 공무원·교원이 아닌 임금 근로자의 업무 외 상병 휴가·휴직은 사용자 재량이나 노사 간 협상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며 "그 결과 업무 외 상병 병가 제도를 운영하는 민간 사업장이 매우 적어 쉴 권리가 양극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슬기 기자 seul97@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