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 사랑이 남긴 수치와 슬픔 ‘액체 상태의 사랑’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21년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펴낸 시인 김연덕의 첫 번째 에세이가 ‘매일과 영원’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됐다. 스쳐 간 사람과 머무는 장소, 그날의 장면과 읽었던 책을 한데 기록한다. 사랑이 남긴 수치와 슬픔조차도 잊어버리기보다 기억하기를 택한 시인의 태도는 불꽃에 안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사람 같다.

사랑에 대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 왜 항상 목조 건물이나 산, 거실, 미니어처 얼음 산 혹은 미니어처 얼음 계곡 등의 공간과 모형을 사용하게 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목조 건물, 산 등의 이미지에 유달리 애착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목조 건물의 경우 서양식이라기보다 외할머니 댁이나 일본 영화 속 고택 같은, 동양식 마룻바닥과 비밀스러운 계단의 이미지를 자주 상상하며 쓰게 된다. _119쪽

얼음을 좋아하는 것은 빛과 유리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얼음은, 빛이 투과하면 반짝이며 투명해지는 부분이 생기고, 그 빛이 지속되면 녹고, 추운 데 놓아 두면 다시 언다. 이런 얼음의 속성이 마음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 목조 주택에 앉아 얼음 산을 깎으며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이런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장면을 생각하면 당위 없이도 다가오는 슬픔과 평화과 같은 것이 있다. _121쪽

사랑은 죽어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얼마쯤 죽어 있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완전한 사랑 역시 얼마쯤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상처도, 모험도,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도 차단된 고요한 상태, 한 자리에 누워 한 장면만 볼 수 있는 상태, 그러니까 환하게 죽어 있는 상태. _133쪽

액체 상태의 사랑 | 김연덕 지음 | 민음사 | 260쪽 | 1만4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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