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성추행 사건 보고받고도 상사 추궁에 '안 받았다'… '보고 직원에 대한 명예훼손 아냐'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부하 직원으로부터 직장 내 성추행 사건 발생 사실을 보고받고도 다른 직원들 앞에서 "보고가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 책임자에 대한 명예훼손죄 유죄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잘못을 추궁하는 상사에게 소극적으로 답변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변명하며 '억울하다'는 취지의 주관적 심경을 표출한 것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죄 성립에 필요한 '사실의 적시'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6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춘천지법 강릉지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한 것에는 명예훼손죄의 고의와 사실의 적시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강원도 동해시의 한 작업장에서 시설장으로 근무하던 A씨는 2018년 10월경 선임직업훈련 교사(팀장)로 근무하던 부하 직원 B씨로부터 회사 내에서 장애인 C씨가 D씨를 뒤에서 안으며 가슴을 만지는 등 모두 5차례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같은 해 11월 26일경 A씨는 가해자 C씨의 모친을 회사로 불러 B씨와 함께 만나 C씨가 D씨를 성추행한 사실과 이에 대해 회사에서 주의와 경고를 받았다는 점에 대한 확인서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6개월 뒤 직장 내 성범죄 발생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에 과태료가 부과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A씨가 상사에게 경과보고를 요구받고 과태료 처분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자 "애초에 B씨가 나한테 성추행 사건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 당시 회의실에는 5명의 다른 직원이 함께 있었다.

검찰은 A씨가 B씨로부터 성추행 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고도 애초 보고를 받지 않은 것처럼 허위사실을 적시해 B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고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하지만 A씨는 이에 불복,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재판에서 A씨는 자신은 B씨로부터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회의에서 한 발언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B씨와 함께 가해자 C씨의 모친을 만난 건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C씨가 어떤 문제행동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면담에 참석만 했고 '보호자 확인서' 내용은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1심과 2심은 이 같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상 면담에 앞서 상급자에게 보고가 이뤄지고, 면담을 마친 뒤에는 결제를 받기 때문에 A씨가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A씨가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B씨가 보고를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마치 B씨의 미숙한 업무처리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했거나, B씨가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려 한 것처럼 다른 직원들이 오인할 수 있게 만들어 B씨의 사회적 가치나 평가를 침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범행이 명확한데도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해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유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검찰이 약식명령을 청구한 벌금 500만원보다 형을 가중해 벌금 600만원을 선고했다. 2심 역시 이 같은 판단이 옳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A씨가 문제의 발언을 하게 된 전후 사정에 비춰볼 때 B씨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를 갖고 B씨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구체적 사실을 적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발언을 하게 된 경위는 상급자로부터 경과보고를 요구받으면서 과태료 처분에 관한 책임을 추궁받자 이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B씨와 관련된 언급을 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며 "그 발설의 내용과 경위·동기 및 상황에 비춰 피고인이 B씨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고의를 갖고 그와 같은 발언을 했다기보다는 상급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책임에 대한 변명을 겸해 단순한 확인 취지의 답변을 소극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과태료 부과 처분을 받게 된 상황이 억울하다'는 취지의 주관적 심경이나 감정을 표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이와 같은 대답을 명예훼손죄에서 말하는 사실의 적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회부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