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영화…너무 일찍 하늘 무대로 떠나다

강수연 1966~2022 한국영화 세계에 알린 원조 월드스타
영화 출연 부담 느끼면서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아
"영화와 관객이 있는 한 영화제는 끝나지 않는다"

지난 7일 별세한 배우 강수연은 자신보다 영화를 더 사랑했던 '월드 스타'였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1987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객석의 영화인들은 놀라워했다. 한국은 물론 동양 여배우가 트로피를 처음 차지해서다. 강수연은 자리에 없었다. 경쟁부문 초청작 시사에도 불참했다. 수상을 기대하지 않은 영화진흥공사에서 참석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만큼 수상은 예견하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다.

강수연은 '씨받이'에서 봉건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 옥녀를 그렸다. 정절과 아들 출산을 강요하는 관습 속에서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옥녀는 아들을 빼앗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무에 목을 매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임 감독은 머리를 비추지 않는다. 목 밑의 뻣뻣하게 굳은 몸만 보여준다. 프레임 상단부 틀을 단두대 칼날처럼 배치해 사회에 의한 타살처럼 묘사한다. 당시 유럽에서 논란이 된 대리모 문제와 맞물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밑바탕에는 강수연의 독창적 연기가 있었다. 선머슴처럼 흉허물 없이 굴던 소녀가 성에 눈뜨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특히 사랑에 빠져 환하게 웃는 얼굴은 양반가의 장중한 건축물에 짓눌려 잔혹한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고작 스무 살에 해낸 일이다. 그는 다섯 살이던 1971년 TBC(동양방송) TV '똘똘이의 모험'으로 데뷔했다. 학교보다 영화 촬영장이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을 만큼 많은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강수연은 스무 살 전후 참여한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 '연산군', '감자',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이상 1987)' 등에서 일찍이 만개한 연기를 뽐냈다. '씨받이'도 그 무렵 촬영했다.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없어 사전에 출산 장면이 담긴 필름 수십 편을 계속 돌려봤다.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조언까지 구하며 실재감을 더했다.

강수연은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임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받아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수상은 임 감독에 대한 세계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예술영화 종주국을 자처하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조차 뒤늦게 주목하고 나섰다. 당시 임 감독은 '장군의 아들(1990)' 등 흥행에 무게를 둔 작품을 만들었다. 한동안 칸영화제와 인연을 맺지 못하다가 2000년 '춘향뎐'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2002년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품었다. 이후 한국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2019)'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독식하는 등 세계시장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정작 강수연은 놀라운 변화에 편승하지 못했다. '경마장 가는 길(199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지독한 사랑(1996)',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송어(1999)' 등 다양한 색깔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이전만큼 호평이나 갈채를 받지 못했다. 한동안 연기도 멀리했다. 작품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는 생전에 "어릴 때보다 작품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고 부담스럽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크고 나이도 나이인 만큼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를 향한 사랑만큼은 여전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싸고 빚어진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등과 파행을 수습하고자 2015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출범 초기부터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애정을 쏟아온 축제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단다. 그는 이듬해 인터뷰에서 "평생 싫은 사람은 안 만나고, 내 주관대로 행동했는데, 영화제 들어와서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처음으로 느꼈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강수연은 영화계의 반발에 떠밀려 2017년 불명예 퇴진했다. 그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인과 관객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말을 전하며 퇴장했다. 한국영화의 영원한 큰 별다웠다. "영화제의 주인은 오직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고 찾아주는 관객이다. 그들이 있는 한 영화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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