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에 父 굶겨 죽인 아들…'영 케어러' 비극

父 숨지게 한 '강도영 사건'에 충격 커져
생활고 겪는 '영 케어러'…실태조사도 미흡
英·日 선진국선 이미 지원 정책 마련
전문가 "가족 부양, 개인 아닌 공공 책임"

젊거나 어린 나이에 부모 부양의 책임을 떠안은 '영 케어러'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표현과 무관.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뇌졸중 환자인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22세 청년 '강도영(가명) 사건'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당초 이 사건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부친을 굶겨 죽인 패륜아 사건처럼 알려졌지만, 실은 강씨 또한 생활고 끝에 아버지를 숨지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강씨 사건 또한 국내에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숱한 '영 케어러' 비극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 케어러는 갑작스러운 가족의 병환으로 인해 돌봄 노동을 떠안게 된 청년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국·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런 청년들을 돕는 사회 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으나, 국내에서는 아직 실태조사 한 번 제대로 진행된 적 없어 상황이 심각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버지 도움 요청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지난 8월13일 대구지법 형사합의11부(재판장 이상오)는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된 강씨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강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 가까이 식물인간으로 지낸 아버지에게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는 "아들은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생명과 신체에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할 법적인 보호 의무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탐사보도 전문매체 '셜록'의 취재 결과, 이 사건 이면에는 강씨로선 감당할 수 없었던 생활고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공장 노동자였던 강씨의 아버지 A씨가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진 당시 강씨는 막 대학을 휴학하고 공익 근무를 앞두고 있던 청년이었다. 갑작스럽게 수입이 끊긴 가운데 A씨의 수술, 입원, 요양치료 등으로 병원비가 약 2000만원 가까이 나왔다. 이미 생활비, 집세, 수도세 등을 마련해야 하는 가장이었던 강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식물인간 상태인 아버지의 영양식을 끊어 숨지게 한 22세 청년 강도영(가명)씨 사건 이면에는 끔찍한 생활고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사진=연합뉴스

월세가 밀려 가스와 인터넷이 끊기고, 당장 먹을 쌀까지 바닥나자 결국 강씨는 아버지를 퇴원시켜야만 했다.

검찰 수사에서 강씨는 A씨의 퇴원 이후 "이렇게 살기는 어렵겠다 생각해서 그냥 돌아가시게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지난 5월1일부터 간헐적으로 '아들, 아들아'라는 아버지의 도움 요청을 들었음에도 모른 척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울다가 그대로 방문을 닫고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자백했다.

고령화·저출산 시대 그림자 '영 케어러'

강씨 사건은 전형적인 '영 케어러(young carer·젊은 부양자)'의 비극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영 케어러는 젊은 나이부터 부모를 돌보는 청년들을 이르는 신조어로, 지난 2014년 영국에서 만들어져 전파됐다. 영 케어러는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시기에 부양 의무를 떠안게 되며, 소득이 부족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국내에도 최근 영 케어러들의 고백을 담은 책들이 출판돼 주목받은 바 있다. 지난 2019년에는 조기현 작가의 저서 '아빠의 아빠가 됐다'가 출간됐다. 이 책은 20세 시절부터 약 9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뒷바라지한 청년의 수기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조 작가는 책에서 "주위에서는 (나를) '효자'로 부르기도 했다"면서도 "어느새 2인분의 삶을 담당하는 가장이 됐고 돈·일·질병돌봄이 나를 압도하고 초과했다"라고 토로했다.

부모 간병의 짐을 떠안게 된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고령화·저출산 사회 전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첫 아이를 가지는 부모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다 보니, 부양 의무를 지는 자녀는 오히려 어려지는 것이다. 또 과거에는 부모가 아프면 여러 자녀가 돌아가면서 돌봄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한두명의 자녀가 이를 오롯이 감당해야 해 부담은 급격히 커진다.

실태조사도 진행 안돼…갈 길 먼 영 케어러 복지

국내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를 경험한 선진국은 이미 영 케어러에 대한 지원 방안을 확립하고 있다. 영 케어러라는 단어를 만든 영국에서는 지난 2014년 '아동가족법'을 통해 영 케어러의 법적 정의를 명시했으며, 2019년부터는 보조금 지원을 포함한 여러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4년 '아동가족법'을 통해 영 케어러의 법적 정의를 명시한 영국 보건당국은 이미 관련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사진은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영 케어러 권리 및 혜택 설명문. / 사진=NHS 공식 홈페이지 캡처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care service·NHS)는 공식 홈페이지에 영 케어러에게 주어지는 권리와 혜택을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란을 보면, 영 케어러들은 부모를 대신 돌봐 줄 지역 정부 소속 사회 복지사로부터 언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필요할 경우 자신의 학업이나 직무 훈련 조언을 얻거나 일자리 소개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기준 국가 평균 연령 48.4세로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일본 또한 영 케어러들 가정에 가사노동 지원, 간병, 온라인 상담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선 아직 제대로 된 영 케어러 가계 실태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아, 현재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부양 의무를 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도영 사건' 같은 비극이 언제라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전문가 "영 케어러 구체적 범위 규정 시급"

논란이 커진 가운데, 정치권에서도 영 케어러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 5일 국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영 케어러에 대해 언급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들조차 최대한 국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온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지 못한 것은 저희들의 책임"이라며 제도 보완을 약속했다.

한국보다 일찍이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에서는 이미 영 케어러를 위한 각종 복지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중 특정 표현과 관계 없음. / 사진=연합뉴스

관련 법안도 발의되고 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8일 '청소년복지 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안은 영 케어러를 '가족돌봄청소년'으로 명명하고, 이들에 대한 실태를 조사한 뒤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규정이 핵심이다.

전문가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촘촘하면서도 선제적인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성호 성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 케어러를 지원함에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우선 영 케어러의 구체적인 정의와 범위"라며 "몇살까지의 성인 부양의무자를 영 케어러로 규정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정해야 실태조사와 관련 지원책도 따라올 수 있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어 "국내에서도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선제적이고 촘촘한 복지를 구축하려면 우선 가족 부양은 개개인이 아닌 사회의 공적 책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우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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