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영화읽기]분위기는 곡성인데…무섭지가 않다, 그저 기괴할 뿐

나홍진 제작 태국 영화 '랑종'
태국 무당가문 파국 담은 페이크 다큐…빈곤지역, 업보와 대물림 표현
자극적인 장면 나열 아쉬워…신앙의 몰락으로 급 마무리

영화 '랑종' 스틸 컷

태국 영화 ‘랑종’은 무당 가문이 겪는 파국을 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취재 대상은 조상신 바얀을 모시는 무당 님(싸와니 우툼마). 형부의 부음을 듣고 촬영팀과 장례식을 찾는데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겟)에게서 섬뜩한 기운을 느낀다. "밍, 괜찮아? 아빠 시신을 처음 본 게 너라고 하던데." "전 괜찮아요." 밍은 이내 폭력적으로 변한다. 뭔가에 빙의돼 계속 이상 증세를 보인다.

밍을 괴롭히는 정체는 님이 모시는 바얀으로 보인다. 밍은 직장인 인력사무소에서 하혈로 고생한다. 성탄절 행사로 분주한 교회에서는 손톱으로 이를 긁어 피를 낸다. 직업과 종교를 포기하고 무당의 순리를 받아들이라는 경고다. 엄마 노이(씨라니 얀키띠칸)는 "내 딸을 무당으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그도 비슷한 신병을 앓은 적이 있다. 교회를 찾아가고 속옷을 바꾸면서까지 신내림을 거부해 동생 님이 바얀을 모시게 됐다.

태국 민간 신앙의 개념은 피(phi)와 콴(khwan)으로 구분된다. ‘랑종’은 전자를 다룬다. 두려움과 의지의 대상이다. 강, 바다, 산, 나무 등에 거하는 자연의 정령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망령, 조상신, 토지신, 마을 수호신 등을 망라한다. 태국 왕실학술원 백과사전에 따르면 피는 이익이 되지만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좋은 피도 있지만 나쁜 피도 있는 것이다. 농촌이나 밀림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지금도 피를 의식하며 지낸다.

영화 '랑종' 스틸 컷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에도 피와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시골 처녀로 보이는 무명(천우희)이다. 일광(황정민)이 종구(곽도원)의 집 앞에 나타나자 신통력을 발휘해 내쫓는다. 대문에 귀신 잡는 덫인 금어초도 걸어놓는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하나같이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파국을 맞는다. ‘랑종’에서는 노이가 그런 배역이다. 딸을 구하겠다는 마음만 앞서 사태를 악화시킨다. 밍에게 친가 남성들에게 학살당한 영혼들이 빙의한다.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학살의 실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배경인 태국 북동부 이산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태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다. 주민들은 정치, 경제, 문화가 방콕과 중부 지방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시발점은 교육이었다. 태국은 1885년 근대 교육제도 확대 정책을 수립하고, 1921년부터 초등 교육 의무화를 실시했다. 통일된 교과 내용은 시암인(방콕과 중부지역 주민) 중심의 언어와 역사, 지리. 국왕과 불교도 존중하도록 강요했다.

영화 '랑종' 스틸 컷

이에 반발한 향토 창극 가수 노이는 반정부 운동을 일으켰다. 지역주민에게 정부에 세금을 내지 말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도록 촉구했다. 그가 체포된 뒤에도 항의는 계속됐다. 이산 출신 정치인들이 방콕 정부에 경제적 상황 개선과 공평한 경제 정책을 요구했다. 군부 쿠데타로 재집권한 피분 정권은 동북부 분리·독립을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살해했다. 1970년대에는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탄압했다. 밍의 친가는 그 주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방콕과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추진된 산업 정책으로 지역 경제 격차는 더 벌어진 상태다. 방콕으로 이주한 이산인은 비숙련 노동자로서 저임금에 육체적으로 고달픈 일을 한다. 라오어에 가까운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계급의식과 종족 차별로 생긴 불쾌한 감정은 이산인이 공통된 문화의식으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랑종’은 그렇게 공고해진 샤머니즘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영화 '랑종' 스틸 컷

피산다나쿤 감독은 업보와 대물림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과정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로 보여준다. 촬영자의 행방불명으로 사라졌다 발견된 영상이 공개됐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하위 장르다. ‘블레어 윗치(1999)’, ‘알.이.씨(2007)’,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 등에서 사용돼 유명해졌다. ‘랑종’에서 촬영자는 좀처럼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기괴한 광경을 자세히 들여다볼 뿐이다. 이산인 문제를 알면서도 방관해온 관람객의 시선과 닮아있다.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이 돼서야 얼굴을 드러낸다.

일치되는 시선은 공포 전달에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랑종’에는 이렇다 할 무서운 요소가 없다. ‘곡성’이 조성했던 긴장의 본질을 조금도 구현하지 못하고 자극적인 장면만 내세운다. 영화 주제와 관련이 없는 애완견을 삶아 먹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랑종’은 여성을 조명하는 방식도 지극히 관음적이다. 하혈하는 밍을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가 촬영할 정도다. CCTV에 녹화된 섹스 장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밍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 '랑종' 스틸 컷

자극적인 장면을 나열하기 바쁜 공포영화는 캐릭터성을 놓치기 쉽다. ‘랑종’도 전철을 피하지 못한다. 배역들이 한순간 사라지거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화두의 틈을 조금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한다. 바얀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님이 그렇다. 갑작스레 퇴장하면서 신앙의 몰락 정도로 마무리된다. 원작을 썼다는 나홍진 감독은 제작자로만 이름을 올리고 물러나 있다. 결과물이 불만족스러운 게 아닐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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