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스틸 컷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조명한다. 특별수사본부까지 차려졌지만 행방이 묘연한 범인. 신동철 반장(송재호)이 부임하면서 수사는 활력을 띤다. 라디오 프로그램 ‘저녁의 인기가요’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흐를 때마다 사건이 발생하는 패턴을 파악한다. 신 반장은 또 한 번 ‘우울한 편지’가 흘러나오자 어디론가 다급하게 전화를 건다. “어, 비상사태부터 날리고, 전경 2개 중대 좀 보내주소. 정보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에요. 당장 터지고 맙니데이.”
수사는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신 반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머지 병력 한 명도 없단다. 전경들, 시위 진압하러 수원 시내 다 나가버렸다고 하네.” 그렇게 또 한 명의 여인이 살해된다. 암울한 억압의 시대에 보호받지 못한 희생양.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기록이자 상처다. 신 방장은 죄인처럼 참담하게 고개를 떨군다. 수사 방향을 묻는 기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원로배우 송재호씨가 표현한 무력감은 낯설지 않다. 오랜 독재와 부패에 시달린 우리들의 얼굴이다. 시대의 불행에 고뇌했던 최소한의 양심을 가리킨다. 묵직하고 너그러운 인상으로 허무함과 무상함을 실어나른다.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 컷
인생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온 송씨가 지난 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고인은 평양 출신이다.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부터 KBS 부산방송총국에서 성우로 활동했다. 1964년 영화 ‘학사주점’을 시작으로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에는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고인은 은막에서 격동의 시대를 자주 가리켰다. 슬픔 서린 얼굴로 아픈 기억을 반추하게 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에서 연기한 창수가 대표적인 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영자(염복순)를 끝까지 보듬는다. 영자는 1970년대 경제 개발 속에 숱하게 좌절해야 했던 소외된 젊은이들을 상징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뒤 매춘부로 전락한다. 창수는 기구한 삶을 보여주는 창틀이자 구원자다. 성병을 고치기 위해 영자를 병원에 데려가고, 그녀가 손님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매일같이 붉은 방을 들락거린다. 한밤중 목욕탕으로 몰래 데려가 목욕도 시켜준다.
“이렇게 몸을 맡기고 있으니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요즘은 괜히 자꾸 남들 눈치가 보여. 내가 하는 건 모두 창피하단 생각이 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았는데. 창수 때문인가봐.” “나 때문이라니. 내가 왜?” “나도 몰라. 하여튼 창수가 나타나고서부터 걸핏하면 창피해지는걸.”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스틸 컷
고인은 선한 얼굴로 당시 여성들이 겪던 애환을 따스하게 품어준다. 사랑하는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 응시하며 버팀목이 돼준다. 그는 스크린 밖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2012년 한국방송연기자노조 일원으로서 KBS에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며 촬영거부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는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이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해서 결심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환경과 어린이에도 관심이 많았다. 1999년 하남국제환경박람회조직위원회 홍보위원으로 활동했고, 최근까지 야생생물관리협회장을 역임했다. 2010년에는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 문화재사랑 어린이 창작동요제 홍보대사 등을 지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