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행복의 근육을 키우는 일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아시아경제]"선생님은 어떨 때 행복하신가요." 묻고 답하는 게 직업이라 웬만한 질문에는 당황하지 않는데, 이 질문에는 잠시 멍했다. 부산 남천동 인디고 서원에서였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의 첫 걸음을 개척한 예쁜 곳이다. 그 날 청소년들과 함께 시와 노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 뭉근한 아이들 질문이 참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이 나를 아득하게 했다. '어, 내가 언제 행복하지?' 물론 잘 안다. 나는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 걸을 때 행복하고 감사하다.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책 읽을 때 행복하다. 노래 부를 때, 강의 갈 때도 행복하다. 파란 하늘 아래서 행복하다. 수업에 3, 4분 늦는다면 그건 유난히 맑은 하늘에 한 눈 팔려 그리 된 거다.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 행복하세요"란 질문에 왜 당황했을까. 꽤 오랫동안 행복이란 단어를 밀쳐두고 있어서다. 그래서 쭈뼛쭈뼛 고백했다. "저는 사실 행복지수가 높은 편인데, 행복한 게 좀 미안한 세상에 살다보니…." 더듬어보니, '행복'을 이야기하는 일이 내겐 오랫동안 일종의 사치였다. 시와 인문학, 한 길만 좇아 2005년 학위를 받고 돌아오니 모든 가치 위에 돈이 군림한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최근 10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의 대학에서 청년들 얼굴을 마주하면 늘 좀 미안하다. "선생님, 취직해봤자 알바랑 다를 바 없어요. 언제 잘릴지도 모르고요." 취준생에게 "힘들지" 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명명한,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교육자로 살며 나는 늘 '책임'과 '의무'를 앞에 두고 '행복'을 뒤로 했다. 별이 된 세월호 아이들, 죽어가는 독거노인들, 숨이 턱에 차도록 공부해도 취업문이 막힌 학생들. 컵라면을 남기고 죽은 아이, 상사에게 성폭행 당하고 자살을 택한 여군의 영정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됨의 권리를 말할 수 있을까. 합의한 성관계로 유죄 판결 받은 군인, 위안부 할머니를 위하는 일로 법정에 선 대학생 앞에서 행복은 미안한 단어다.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SNS에서 대놓고 또래들을 조롱한 이의 엄마는 국정농단으로 감옥에 있다. 그동안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의 눈치만 보며 타협했다. 상식과 희생과 인권과 공공의 가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에 규정된 행복추구권은 너무 먼 권리였다. 내게도 행복은 윤리적인 금기어였다. 도저히 더는 안 된다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모두의 염원이 모여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새 대통령, 바뀐 바람,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으로 들뜬 지금에 와서도 행복은 여전히 좀 이상한 이름이다. 쓰지 않은 근육 마냥 욱신욱신하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경쟁적이고 여전히 쉽게 얼굴 붉히며 싸운다. 인디고 서원에서 마주한 그 질문은 내게 새로운 숙제를 던졌다. 우리 몸의 근육도 안 쓰면 약해지고 쓰면 강해지듯, 마음의 행복 또한 만들어 쓰고 단단히 키울 필요가 있다. 행복의 근육은 행복 이 가능한 조건을 뼈대로 하여 지속적으로 키워나가는 것. 행복의 조건은 아파트나 권력,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인간됨의 기본 권리이며 정상의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행복의 근육을 골고루 키우려면 그릇된 행복의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행복 평균주의에서 벗어나 다름과 차이가 함께 공생하는 삶, 살만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이 실천으로 구체화될 때 행복은 커진다. 무엇보다 행복의 근육은 우리 각자가 매일 처음처럼 연습해야 한다. 오늘 쓰지 않으면 그만큼 퇴화하기에.정은귀 한국외대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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