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의 행인일기 32] 연남동 가는 길

지하철에서 졸거나 자다가 화들짝 놀라 깨면 주변부터 한번 쓱 둘러보게 됩니다. 그 사이에, 누군가 저를 지켜본 시선이 없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부끄럽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까 염려하며 훑어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의구심. 코를 골진 않았는지, 침이나 흘리지 않았는지, 옆 사람이 눈을 흘길만한 일은 없었는지.별다른 혐의가 감지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왠지 미심쩍어지면 얼굴이 뜨뜻해집니다. 출퇴근길엔 더욱 그렇습니다. 제겐 낯선 얼굴이지만 상대방은 저를 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욱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어디선가 제 강의를 들은 일이 있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생겨납니다.선생노릇을 이십 년 넘게 해온데다, 인연 맺은 학교 혹은 교실만도 다섯 손가락을 넘는 까닭입니다. 생각이 거기 미치면, 졸음이 싹 가십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바로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게 됩니다. 누군가 불쑥 '선생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건네올 것만 같아서, 슬며시 차 안을 한 번 더 둘러봅니다. 교단에 서는 분들이라면 제 얘기에 쉽게 공감해주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생이란 직업의 불편함입니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공연한 강박증을 갖고 다닙니다. 어묵 꼬치나 붕어빵 따위 길거리 음식을 사먹어도 사방을 둘러보고, 무단횡단을 해도 차보다 먼저 행인들을 살핍니다.
물론 제 지나친 '벽(癖)'이거나 엄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교사는 대부분 그런 분들이라 믿습니다. 한없이 부끄러운 인생과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의 차이를 아는 사람. '염치(廉恥)'와 오래 사귀어서, 부끄러움의 얼굴을 잘 알아보는 사람. 치욕과 굴욕의 몽타주를 젊은 벗들에게 나눠주는 사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일. 당연히 어렵기 짝이 없지요.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검열'에 걸려서 엄청난 자괴감(自愧感)에 시달릴 때도 적지 않습니다. 제 경우엔 무엇인가 잘못 가르쳤다는 기억이 떠오를 때 그렇습니다. "아뿔싸. 그 때 그 학생들은 틀린 것을 평생 옳다고 믿고 살아가겠구나."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지요. 별의별 걱정이 다 일어납니다. 온갖 상상이 꼬리를 뭅니다. 환청(幻聽)까지 생깁니다. 어느 회사 회의실에서 어떤 졸업생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학시절에 우리 선생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저는 그것을 진리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 모두가 기억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떤 학생은 듣는 순간 지워버리고, 어떤 학생은 해가 바뀌면 잊어버립니다. 어떤 학생은 몇 년 쯤 더 간직하다가 새롭고 흥미로운 어떤 지식과 바꿉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가 박힌 어떤 문장은 세월과 상관없이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누군가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 세상의 모든 교사에게 그것은 일종의 '공포'입니다. 시시한 이야기를 내내 지우지 않고 있다는 것. 별 뜻 없이 한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간직한다는 것. 시원찮게 전달했거나 서툴게 가르쳐서 정반대로 알아들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선생을 메이커에 비유한다면, 그릇된 지식의 주인들은 잘못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불량품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은 유통과정에서 변질된 물건을 온전하다고 믿고 쓰는 사람들입니다. 억울한 소비자들입니다. '리콜'을 요구하거나 최소한 '애프터서비스'라도 요청할 권리가 있는 고객들입니다. '스승'이라는 제조업자가 생산한 제품은 보증이나 수리 기간이 따로 없습니다. 당연히 '영구보증', '100% 무상 수리'가 원칙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졸업생들을 모아놓고 잘못 가르친 것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설레고 기쁠까요. 못쓰게 된 지식이나 신념을 새것으로 교환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찰까요. 소생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자리를 마련했답니다. 이름 하여 'AS 콘서트'. '서비스 맨'인 저는 오늘 저녁 여덟시에 그곳엘 가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핫 플레이스'의 하나인 연남동 어느 스튜디오입니다. 가서,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한 수십 명의 고객을 만나야 합니다.서비스가 만족스럽다면 고객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밥도 주고 술도 한잔 주겠지요. '김영란 법'과도 상관이 없으니, 마음 놓고 얻어먹어도 좋을 것입니다. 윤제림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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