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현기자
독립운동가 이재명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의사가 집도한 흉부외과 수술 덕에 살아났다고 한다. 수술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이뤄졌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첫 흉부외과 수술 기록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 동맥에 심한 출혈이 있었고 이에 따른 폐 손상으로 좌측 흉부타박상과 외상성 늑막염 등이 생긴 상태였다. 이 기록이 정확한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완용이 죽다 살아난 것은 맞아 보인다.이날 의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보면 이재명의 풍채에 대해 "용모가 화려하고 눈에 영채가 있다"고 썼다. 이 아름다운 청년은 미국노동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는데 조국이 일제에 강점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의 첫 목표는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하지만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고,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사살하자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매국노를 없애기로 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토를 비롯해 이완용 등도 당초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 중 공범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공범이 있다면 2000만 동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0년 일제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왜법이 불공평해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조국을 위한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형은 같은 해 9월13일 집행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