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불과 한 달 전, 필자는 스위스 클로텐에 있었다. 세계 최초의 사이보그 올림픽 '사이배슬론(Cybathlon) 2016'을 참관하며, 인류의 진화과정을 미리 엿보았다. 3주 전에는 대전과 경주에 있었다. 두 주 동안 이어진 로봇계의 주요 학회들을 오가며 첨단기술의 진보를 지켜봤다. 시월 내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올랐던 내 마음은, 며칠 새 참혹하게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에바 세대'의 고백 필자는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존재하는 동안, 컴퓨터 혁명과 인터넷 혁명이 지나갔고, 이제 모바일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닷컴 버블과 벤처 붐, IMF를 거쳐, 바야흐로 제2의 벤처 붐이랄 만한 스타트업 빅뱅과 인더스트리4.0 시대를 살고 있다. 뻔히 눈 뜨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지나쳐버린 일들이 안타까워서, 이제부터라도 더 크게 눈 뜨고 살아볼 참이다. 로봇이나 사이보그에 대한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관심 역시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나는 대학에 와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각성한 세대다. 우리는 문화라는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해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당대 문화의 최전방에 있었다. 에바는 우리에게 인류 최후의 전쟁 이후, 남아 있는 사람들의 그럴 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음과 모습이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인지를 물었다. 최근 다시 본 에바에서 이채로웠던 것은, '세컨드 임팩트' 이후에도 여전히 학생들을 교실에 가두고 프로이센 스타일로 교육하는, 소년 소녀 파일럿들의 학교였다. 인류의 반이 절멸한 '사고'에 대한 진실은 극소수의 권력자만이 파악한 비밀이었고, 신탁을 내리는 자들과 정치군인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진실을 감췄다. 언론은 제한된 정보만 노출했고, 학교는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다. 과학은 거짓을 위해 복무했다. 진실에 다가서려는 인간들은 죽거나 사라졌다. 지구의 운명을 짊어지고 로봇을 움직여 외계생명체와 싸우는 건 겨우 14세의 아이들. 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전쟁에 내몰리고, 워크맨과 공중전화기를 통해 겨우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생체를 복제한 거대로봇과 외계인의 우주전쟁을 그리면서, 고작 그 정도의 시대착오적 정치와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이라니.◆새로운 세대를 위한 정치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에바 세대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를 살고 있다. 그들은 '양띵'과 '도티'가 중계하는 <마인크래프트>를 '하며' 자라는 친구들이다. 자신들의 플레이를 중계하고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다. 직접 코딩을 해서 앱도 게임도 만든다. 여전히 구태의연한 교육만도 미안한데, 이토록 '후진' 정치현실을 보여주자니 기가 막힌다. 로봇과 인공지능 혁명을 앞둔 21세기의 아이들에게 ‘무당’이나 ‘빙의’ 같은 말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서 공무원 시험, 토익 준비에만 몰두한다고 비난받던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능이 내일모레인 고등학생들마저 나섰다. 이번 아이슬란드 총선에선 낡고 부패한 기존 정치권을 뒤집어엎는 '좌파녹색당' '해적당'이 혁명적인 수준의 득표를 했다. 우리에게도 신인류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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