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도 정치경제부 차장
화창한 봄날이었다. 17대 총선을 불과 며칠 남긴 2004년 4월의 어느 날, 서울 여의도 새천년민주당사를 출발한 유세 지원버스는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취재진은 동요했다. 예정대로라면 지척인 '영등포을'의 김민석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유세장에 닿았어야 했다. 기수를 돌린 버스는 곧바로 두 번째 행선지인 전북 전주로 향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버스에는 주요 당직자와 추미애 당시 선거대책위원장이 타고 있었다. 예고 없는 첫 일정 취소로 뒷말이 무성했다. 추 위원장과 김 후보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영향을 끼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원 유세에서 제외된 김 후보는 공교롭게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여태껏 국회에 재입성하지 못하고 있다.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소원해진 듯 보였다. 지난 20일 원외정당인 이른바 '마포 민주당'의 김민석 전 대표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의 공식 통합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들은 화기애애한 모습도 내비쳤다. 지난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민주당의 창당 61주년이 되는 날에는 대선배인 혜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를 함께 찾아 깜짝 '드라마'를 연출했다. 추 대표는 김 전 대표를 가리켜 '동지'라고 불렀다. 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이란 약칭을 되찾았고, 김 전 대표는 민주당의 원외위원장으로 되돌아왔다. 공교롭게도 12년여의 시간차를 둔 두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추 대표가 족쇄를 모두 벗었다"는 관전평이 나올 만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추 대표에게 첫 족쇄였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도운 추 대표는 이듬해 "멋모르고 대선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 염치없고 죄송스럽다"고 고백했다.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의 분당으로 연일 쏟아지던 '노 전 대통령 때리기'의 결정타였다. 이후 탄핵에 동참했다.반면 노 전 대통령은 16대 대선 마지막 유세에서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정동영도 있고 추미애도 있다"며 추 대표를 치켜세웠다. 이 발언으로 대선 투표를 불과 10시간 앞두고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는 파기됐다. 이렇게 쌓인 친노(친노무현)와의 앙금은 최근 솔직한 사과로 일단락됐다. 더민주의 지난 8·27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면죄부도 얻었다. 다른 족쇄는 바로 김 전 대표와의 관계였다. 추 대표는 16대 대선 직후 그의 복당을 극구 반대했다.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다가 복당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런 추 대표는 우리당과의 분당 이후 탄핵 역풍으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새천년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에서, 17대 총선 선대위원장으로 투입됐지만 조순형 당시 대표 측과 '옥쇄파동'을 겪었다. 정풍운동은 무산됐다. 야구로 치면 '패전처리' 투수였던 셈이다. "밥심으로 버틴다"며 웃던 그는 총선 당일 임진각을 찾아 '희망날리기'행사에 참석했다가 황망하게 되돌아왔다. 9(민주당) 대 152(우리당). 참담한 점수차였다. 한순간에 야인의 처지로 떨어졌다. 2008년 18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복귀했으나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열망하던 '선발 투수' 자리를 꿰찼다. 다시 과제도 떠안았다. 친문(친문재인)과의 관계 재설정과 포용성 확장이다. 중도와 제3지대 정치인을 껴안고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광폭행보에 나서야 한다. 또 제1야당 대표로서 흔들리는 박근혜정권의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2003년 추 대표와 가장 빈번하게 비교되던 경쟁 상대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12년 전 어느 날 목도했던 '버스 회차 사건'은 앞으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강한' '건강한' 야당이 들어서야, 여당도 건강해진다. 일종의 '상승효과'다. 게다가 지금은 비상시국이 아닌가. 추 대표의 향후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오상도 정치경제부 차장 sdo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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