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에 씌어진 희생자 숫자.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요즘 북한 핵개발 갈등을 계기로 전쟁을 언급하는 이들이 있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는 목적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다. 체제 유지를 위한 협상 카드라는 거다. 그럼에도 전쟁을 언급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은 왜 일까?전쟁 가능성과 대비를 언급하는 이들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유고 등 체제 붕괴 과정에서 '급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금언을 들이대며 말이다. 군인들이 흔히 신조로 갖고 있는 이 말은 서기 4~5세기경 고대 로마제국의 장군 베게티우스의 저작 '군사학 논고'에 나온다. 평상시에도 전쟁을 준비해야 남들이 만만치 보지 않고 쳐들어오지 않으며, 설혹 침략을 당해도 곧 퇴치해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겠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전쟁이라…. 말은 쉽지만 전쟁 대비론자들은 과연 한반도에서 벌어질 전쟁이 어떤 결과를 안겨 줄 지 진지하게 고민이나 해보고 그런 말을 내뱉는 걸까?필자는 최근 전쟁이 가져다 준 참혹한 상처를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북미 순방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을 따라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 국립공원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를 찾은 자리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달 1일 설치됐는데, 직접 가보니 골든게이트브리지(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만(灣)이 내려다보이는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 맞은편의 터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 서부 지역에서는 최초로 놓인 한국전 기념비라 의미도 깊었다. 폭 10m, 높이 3m의 화강암에 한국전쟁과 미군 참전사(史), 사진 등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념비 한쪽 모퉁이에 새겨진 한국전쟁 희생자 숫자였다. 미군 3만6914명, 한국군 11만3248명, 다른 동맹국 군인 2768명…. 여기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북한군 31만6579명…? 살짝 놀랐다. 한국군의 약 3배, 미군의 약 9배, 한국군ㆍ미군ㆍ기타 동맹군 등 상대방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2배 이상 많았다. 북한은 늘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미국도 은근히 자존심 상해하던 한국전쟁의 결과가 맞나 싶었다. 이번엔 중국군, 46만명…? 도와주겠다고 나선 동맹군인 북한군보다도 훨씬 더 많이(+14만5000명) 전사했다. 게다가 적국 미군보다 12배가량이나 많다. 무기가 부족했던 중국군이 병력의 일부에 피리와 꽹과리만 손에 쥐어주고 돌격시켰다는 인해 전술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군이 폭격기 등 전략 무기로 평양 시내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는 전사(戰史)도 떠올랐다. 동행했던 한 기자가 이 숫자를 보더니 "이소룡도 12대1로 싸우면 진다"며 혀를 내둘렀다.
6.25 한국전쟁 당시 충남 공주시 상왕동(왕촌)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
특히 경악한 것은 마지막 줄 민간인 희생자 숫자였다. 남한 54만7000명, 북한 118만5000명 등 총 173만2000명이나 됐다. 총을 들고 싸운 쌍방의 군인 전사자 수 92만9509명보다도 약 1.86배 많았다. 민간인·군인을 합치면 당시 남북한 인구 2500만명 중 열 명의 한 명꼴로 전쟁의 참화에 희생을 당한 셈이다. 특히 민간인 희생자가 많아 군대로 '피난'가야 된다는 농담이 결코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됐다. 이같은 전쟁이 한국에서 또 한 번 일어난다면 과연 그 피해는 어떨까? 그것도 현재 북한군의 무장 상태로 봤을 때 기존 재래식 무기가 아닌 핵ㆍ생화학 무기 또는 최소한 방사포 등 고성능의 대량 살상 무기가 동원될 가능성이 높은 현실에서 말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가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던 로마는 결국 과도한 침략 전쟁을 감당하지 못해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동로마제국으로 축소됐다. 한때 베게티우스의 금언을 신봉해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핵무기를 개발했다가 히로시마 원폭을 겪게 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 그는 본인의 실책을 깊이 후회한 후 말년에 세계 평화 운동에 힘썼다. "평화는 무력으로 유지될 수 없고 오직 이해를 통해 유지될 수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 그가 남긴 금언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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