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탄생 137주기 - 그 열혈남아는 일제 치하를 어떻게 살아갔는가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 중오늘 태어난 만해 한용운의 시는 요즘 감성으로 읽어도 솔직하고 투박하되 가슴을 내리치는 ‘한 방’이 있다. 조곤조곤 감정을 드러내는 여성적 시어를 통해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 읊조렸던 그이지만, 사실 한용운은 남성적 풍모가 강했던 당대의 상남자였다. 시인이자 스님,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동료들의 변절과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는 와중에도 따스한 인간미와 사랑을 잃지 않았던 로맨티스트기도 했다.
만해는 승려의 결혼 외에도 불교계의 대중적 사상 고취, 승려 자신의 노동력 자활과 인권회복 등 구습을 깨는 혁명적 불교운동을 자신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주창하였다. 아울로 대중들이 읽고 접하기 어려운 대장경을 쉽게 풀어 쓴 [불교대전]을 간행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다방면에서 저술활동을 펼쳤다. 사진 = 만해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스님의 결혼을 허하라!출가 전 한용운은 집안 간 약속에 의해 14살에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결혼 2년 만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집을 나설만큼 가정에 무심한 남편이었다. 첫아들을 얻었으나 돌보지 않았으므로 부자의 정 또한 크게 없었다고 한다. 아들 한보국 역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 이후 출가했다. 그랬던 그가 스님의 결혼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용운은 불교의 근대화에 앞장선 대표적 승려였고, 조선 말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나날이 쇠락해가는 불교가 보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승려 또한 범속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1909년 ‘조선불교유신론’의 집필을 마치면서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듬해인 1910년 5월엔 중추원과 조선통감부에 공식적으로 이를 청원하는 문건을 진정했다. 비록 그의 청원은 묵살당했으나 생활불교에서는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 부부관계를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은 삶에도 영향을 끼쳐 1931년, 53세의 나이로 당시 32세 간호사인 유숙원과 재혼, 심우장에서 여생을 함께 보냈다.
독립운동에 몸담은 이후 무수히 형무소를 드나들었던 한용운은 젊은시절부터 일제의 감시가 집중된 요주의 인물이었다. 사진은 한용운의 수형기록표.
변절자는 이미 죽은 사람1919년 3.1 운동을 앞두고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해는 급진적인 행동강령을 제안하다 최남선과 날을 세웠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강령 중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가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에 수록,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즉각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체포된 민족대표자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나오자 만해는 감방 안 똥통을 들고 와 그들에게 퍼부으며 일갈했을 만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강직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앞선 수형기록표와 대조했을 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협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 1929년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사상운동자 명부 작성"에 수집된 사진만 2천여 장이며, 1920년 7월부터 1935년까지 전과자의 범죄 수법과 지문, 그리고 사진을 모아놓은 자료는 35만 4,736매에 달했다. 그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요주의 인물은 그 주변까지 면밀히 조사하고 관찰했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을 함께한 최남선이 이후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만해는 그길로 그의 제사를 지내버렸다. 이후 탑골공원 인근에서 우연히 만해와 마주친 최남선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만해는 “당신이 누구요?”라고 차갑게 대꾸했고, 머쓱해진 최남선이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 물으니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를 살아도 자기 뜻을 지키지 못하면 몸은 살았으되 정신은 죽은 사람으로 간주할 만큼 그는 자신에게나 주변에게 엄격했다.
한용운은 조선총독부가 마주보인다는 이유로 살기 좋은 남향을 포기하고 집을 북향으로 지어 만년을 추위와 함께할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사진 = 심우장, 한국관광공사 제공
총독부 보기 싫어 집을 북쪽으로 태평양전쟁의 열기가 거세지자 일제는 조선의 청년들을 징용하기 위해 명망 있는 인사의 회유에 총력을 다했으나, 만해는 되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펼치며 총독부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에 극심히 어려워진 그의 삶을 헤아린 동료들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는데, 볕이 드는 남향이 아닌 추운 북향으로 집을 지어 주변을 아연케 했다. 총독부가 마주 보이는 남향을 하느니 차라리 춥게 살겠다는 생활 속 비타협의 실천이었던 셈. 북향의 집에서 냉방으로 생활하는 중에도 <님의 침묵>, 소설 <흑풍> 등을 발표하며 창작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부처님을 향한 염원을 은유법으로 표현, 세속적이면서도 민족정신이 묻어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가난과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군 장군 김동삼의 시체가 조선에 도착했다는 소식에는 한달음에 찾아가 수습하는 동지애를 보이기도 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기행을 일삼는 승려로 그를 오해할 수 있겠으나, 그는 그런 기행조차 목숨을 내놓고 실행에 옮긴 당대의 실천적 독립운동가였다. ‘나’는 님과 이별하여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님’의 존재를 스스로 깨닫는다는 만해의 노래는 사랑도, 독립도 요원했던 삭막한 시대에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았던 로맨티스트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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